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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신라 27대왕이다. 어릴 때 이름은 덕만이다. 신라 26대 진평왕과 왕비 마야부인 김씨 사이에 태어난 세 딸 중 맏딸이다.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성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준비된 왕재(王才)였음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이 빈번한 시기, 지혜로운 선덕은 김유신과 김춘추 등의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하여 여왕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웠으며 다양한 문화적 업적을 이루어낸 왕이기도 했다. 분황사 황룡사지 첨성대 선덕여왕릉, 사천황사지 선덕여왕 3년(364년)에 건립한 절이며, 분황사 남쪽으 로 바로 앞에 황룡사터가 있다. 국보 제30호인 분황사 석탑은 처음 세울 당시에는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 로 추정되나 지금은 3층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위치 :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 ▲ 분황사 석탑 선덕여왕이 자장의 권유로 백제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해 건립한 9층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몽고 침략 으로 소실되고 지금은 초석과 탑의 무게중심을 유지 하는 역할을 했던 심초석만 남아 있다. (위치 : 경북 경주시 구황동) 선덕여왕이 재위 중에 만 든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 장 오래된 천문대로 대릉 원과 반월성 사이에 자리 하고 있다 (위치: 경주시 인왕동 839-1)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왕의 무덤은 사천왕사터를 가로지르는 철길을 건너 조그마한 낭산狼山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 에 따르면, 선덕왕은 죽기 전 ‘낭산 기슭이 바로 도리천이라며, 내가 죽으 면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좇아 이곳에 여왕의 능 을 만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죽은 지 32년 후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 우게 되어 결국 여왕의 예언은 증명이 되었다. (왕릉 위치 :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 (사천왕사지 위치 :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 인재등용의 리더십, 따뜻한 정치를 펼친 선덕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