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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멸은 하게 되자 치솟는 울분을 억제할 길 없어 숙야로 비분강개하면서 후도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함에 여념이 없더니 마침내 동지 노기주 등 12인으로 더불어 독립의우회를 결성하고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미년 3월 1일 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칠때 18일에는 2만 군중이 진주에서 노도처럼 봉기하니 의우회는 이 때를 놓칠세라 태극기를 제작하고 군중을 동원하여 드디어 700 대중이 동매리에 운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규호하니 그 함성 순식간에 충천하여 지축을 흔들었다. 의거의 행렬은 밤을 잊은 채 치성하니 이에 놀란 왜헌은 총검으로 군중을 강압하고 거사의 주동자인 공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으나 공은 질곡을 무릅쓰고 일발의 동요없이 최후까지 항쟁하였다. 마침내 6월에 미쳐 진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의 옥고는 그 진상을 형언하기 어려우며 석방 후에도 5년간을 와상신음하였다. 여생을 후도에게 광복정신 전수에 심혈을 쏟았으니 그 투철한 민족혼을 아는 이 몇이던가. 그러나 공든 탑은 헛되지 않아 광복 48년 계유에는 민국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함으로 인하여 공의 애국단충은 그 빛을 내외에 발양하게 되었다.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공의 관조는 경순왕 8세손인 고려 인종조의 문렬공 휘 시흥이니 묘청난에 수공하여 위사공신을 배하였고 팔전하여 충의공 백촌 선생 휘 문기는 세조 2년 병자에 시임 판서로써 장릉 복위를 도모하려다 순절하여 정조조에 이르러 의정부 좌찬 홍문관 대제학을 증하고 시하니 공의 15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치숙이요. 조의 휘는 금성이며 고의 휘는 용후요 비는 밀양박씨며 배 안동권씨의 묘는 대당리 마전곡 건좌에 있고 배 창녕성씨의 묘는 마전곡 해좌원이며 4남은 형광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