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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겸(兼) 평양윤(平壤尹)이 되어 덕흥군 일파의 침략을 물리치는 출정군(出征軍)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어 삼사우사 (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순성동덕보리 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374년(공민왕 23) 잠시 면직되었다 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 다. 공민왕(恭愍王)이 피살되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侍中) 경복흥(慶復 興)이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하자 자신의 일파와 모의해 나이 10세의 어린 우왕(禑王)을 즉위시켰다. 한편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 (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해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살해토록 하 고, 그 동안 배척당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이에 삼사좌윤(三 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郎)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 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이인임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며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했다. 그러자 최영(崔瑩)·지윤(池奫) 등과 합심해 이첨 (李詹)·전백영(全伯英)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 仁)·정몽주(鄭夢周)·임효선(林孝先)·정사도(鄭思道)·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 역 시 자신을 해치려 한다며 모두 유배시켰다.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池奫)·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貪虐)을 일삼았다. 이어 영문하 부사(領門下府事)·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영중방 사헌 개성부사(領重房 司 憲 開城府事)에 임명되었고, 우왕 12년(1386년)에는 다시 좌시중(左侍中)이 되 었다가 1387년 노병으로 사직하였다. 1388년에 염흥방(廉興邦)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전직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빼 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이 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순군(巡軍)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그 동안 기회를 엿보던 우왕(禑王)·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오히려 염흥방 (廉興邦)·임견미(林堅味)·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 데, 이 때 인임도 고령군 덕곡면으로 옮겨졌다가 1388년 6월에 죽었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신율리(新栗里) 간좌원(艮坐原)에 있다. 배위는 순천박씨(順天朴 氏)이며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으로 봉하여 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주이씨 대동보(신묘보) 세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