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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 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과 더불어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세칭 ‘죽림 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는데 이들을 중국 위나라 말기의 죽림칠현 (竹林七賢)에 비유하여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 하였다. 강좌칠현이 형성된 때도 바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이후이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 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 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소속의 정4품직으로 ,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담당하는 낭사(郞舍)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었 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공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偏僻)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 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 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저술로는 『은대집(銀臺集)』 20권 · 『후집(後集)』 4권·『쌍명재집(雙明齋集)』 3권·『파한집(破閑集)』 3권이 있어 세상 에 전한다. 아들 이정(李程)·이양(李穰)·이온(李)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 공이 반룡사에 은거(隱居)하였을 때 지은 산거(山居)라는 시가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어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春去化猶在(춘거화유재) / 봄은 갔지만 꽃은 아직 남아 있고 天晴谷自陰(천청곡자음) / 하늘은 개었는데 골짜기는 그늘졌네 杜鵑啼白晝(두견제백주) / 소쩍새 소리 대낮에 듣고서 始覺卜居沈(시각복거침) / 깊은 산골에 살고 있음을 비로소 알겠네. 라고 하였다. 또한 공이 고령군 쌍림면 용1리 상용마을 입구에 있는 자연 바 위에 앉아서 놀았던 곳을 “한림대(翰林臺)라 하며 현재도 남아 있다. 고종 7년 (1220년) 향년 69세로 졸(卒)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령문화사대계 사상편, 디지털 고령문화대전 ●이인립(李仁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