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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 년(1900년) 1월 24일 향년 74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 37번지 장사등(長蛇嶝) 술좌(戌坐)에 있다. 배위는 경규(敬奎)의 딸인 정부 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이인로(李仁老) 본관은 경원(慶源 : 현재는 인천)이며 초명은 득옥(得玉)이고 자는 미수(眉叟 ) 이며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靂)이 며 할아버지는 이언림(李彦林)이다.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의 대표적 문벌 귀 족인 경원이씨(慶源李氏) 가문 출신으로 이백선의 아들로 의종 6년(1152년)에 태어났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종의 우두머리인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 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典籍)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할 수 있 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의 난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橫行)하자 명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어 조정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던 화엄종 사찰인 개경의 흥왕사(興王寺) 승통 (僧統)이었던 요일(寥一)이 중서령(中書令) 두경승(斗景升)과 함께 최충헌(崔忠 憲)을 모해(謀害)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영남 지역으로 쫓겨나 화엄종단의 부흥을 위해 고령의 미숭산(美崇山) 반룡사(盤龍寺)를 중심으로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이념적·윤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를 자각하고 반성하여 이 를 개혁하려는 사회 변혁 운동인 화엄결사(華嚴結社)를 결성하고 있는 그의 숙 부(叔父) 요일(寥一)이 주지로 있었던 고령 반룡사(盤龍寺)로 피신하여 불문(佛 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還俗)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잘 짓 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25세 때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 루 학습하였다. 명종 10년(1180년) 29세 때에는 진사과(進士科)에 장원급제(壯 元及第)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장인인 최영유(崔 永濡)가 금나라에 금나라 하정사(賀正使)로 가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 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書記)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 (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 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 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뱃속에 원고를 담아둔 사람 즉 ‘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