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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 氏) 사이에서 현종 15년(1674년) 태어났다. 재종숙(再從叔)인 진주(震柱)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어려서부터 골격(骨格)이 특수하고 기이하며 성격이 호탕하 여 귀신의 허실과 유무를 알기 위하여 늦은 밤에 사당(祠堂)을 지켜보기도 하 였다. 숙종 29년(1703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영조 4년(1728년) 이 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과 함께 금위 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되어 토벌에 임하게 되었다. 토벌할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兩亂)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하여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 아가려 하지 않자 항상 선봉(先鋒)에 나서서 독전(督戰)하였다. 특히, 죽산전투 (竹山戰鬪)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李遂良)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 정하였다. 그 공적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가선대부 (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전라병사(全 羅兵使)를 거쳐 1730년 평안병사(平安兵使)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 (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조 14년(1790년) 양무(襄武)라는 시호를 받 았으며 고종 27년(1890년)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무신년(戊申年 : 1788년) 공 신들인 풍릉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 등 25명의 사당(祠堂)에 치제 (致祭)하도록 명을 내려 지방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기록이 고종실 록 27권에 기록되어 있다. 영조 27년(1751년) 졸(卒)하였다. 묘는 달성군 다사 읍 문양리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억(檍)의 딸인 해주정씨(海州鄭氏)이다. 註) 가자(加資):정3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以上)의 품계(品階)를 올리던 일을 말한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 考),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전의이씨부정공파파보(경인보) ●이인두(李寅斗)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초휘는 영백(永伯)이고 자는 응서(應瑞)이다. 한성부(漢 城府) 좌윤(左尹)을 증직(贈職)받았던 근배(根培)와 시득(時得)의 딸인 증정부인 (贈貞夫人) 팔계정씨(八溪鄭氏) 사이에서 순조 27년(1827년) 태어났다. 음직(蔭 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兼) 오위장(五衛長)을 지냈다. 고종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