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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 ●이승후(李升厚)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퇴여(退如)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익형(益 馨)과 현감(縣監) 만규(萬規)의 딸인 풍산홍씨(豊山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효 종 10년(1659년) 태어났다. 영조 1년(1725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부장(部 長)을 지내고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麟佐) 난 때 공이 있어 분무원종공신 (奮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영조 27년(1751년) 향년 93세로 졸 (卒)하였다. 묘는 노현(蘆峴) 건좌(乾坐)에 있다. 배위는 원중(遠重)의 딸인 의 성김씨(義城金氏)이다.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분무원종공신녹권(奮武原從功臣錄 券) ●이승휴(李承休) 본관은 가리(加利)이며 자는 휴휴(休休)이며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 ) 이다. 고종 11년(1224년)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嘉利縣)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지만 공부에 힘써 고종 39년(125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 다음해에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현(三陟縣)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 곳 두타산(頭陁山)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원종 4년(1263년)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유천우(兪千遇)·원부 (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 등에게 관직을 청원하는 시(詩)인 구관시(求官詩 ) 를 지어 보냈고, 다음해에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의 천거(薦擧)를 받아 경흥 부서기(慶興府書記)에 보임되었다가 내직에 들어가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되었다. 1270년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인 삼별초(三別抄)가 봉기했을 때에는 군수물자(軍需物資)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 선(營繕)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며 그 폐해를 극론(極論)하였다. 1273년에는 식목녹사(式目錄事)로 있으면서 당시 공(功)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초배(超 拜)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했다가 오히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바 로 그해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러한 공으로 잡직령(雜織令) 겸 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충렬왕(忠烈 王)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時政)의 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右司 諫)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 뇌물을 받은 관리 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