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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구절이 전해지고 있는데 “一絶淸遠(일절청원) 蕭散不滯於窠臼(소산불체체어과 구) : 한가하고 자유로워서 기존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세종조 (世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간 원(司諫院) 헌납(獻納)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성주 정곡(鼎谷)에서 고령 관 동(舘洞)에 처음 옮겨 살았던 성산이씨 고령입향조(高靈入鄕祖)이다. 향중(鄕 中)의 사림(士林)들이 종장(宗匠)으로 추대하고 고령에 문헌이 있다고 하는 것 은 이 공(公)으로부터 열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 다. 배위는 숙인(淑人) 고령이씨(高靈李氏)로 목사(牧使) 인실(仁實)의 딸이다 . 묘는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구 성주 흑수방(黑水坊) 내흑수(內黑手) 헌납동(獻 納洞) 을좌(乙坐)에 있으며 묘갈명은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낸 일선(一善) 김 상직(金相稷)이 짓고 방손(傍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원조(源祚)가 썼다. 참고문헌 : 경북을 빛낸 인물(경상북도), 성산이씨세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이서(李)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이직(以直)이고 호는 동호(東湖)이다. 진사(進士) 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했던 모재(茅齋) 홍우(弘宇)와 참봉(參奉) 개(漑)의 딸인 진양강씨(晋陽姜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명종 21년 (1566년) 11월 12일에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이며 문학 과 의로운 행실로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선조 30년(1605년)에 진사(進 士)에 오르고, 선조 41년(1608년)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었으나 불사(不 仕)하였다. 광해군 1년(1605년)에 서황산찰방(署黃山察訪)에 제수(除授)되었고, 동년(同年)에 스승인 대사간(大司諫)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임해군(臨海君 )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임해군을 용서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사 임(辭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니 공도 역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승 명편5선생예설(承命編五先生禮說)을 편찬하였다. 광해군 12년(1620년)에 고모 부(姑母夫)인 한강선생(寒岡先生)이 운명(殞命)하매 심상(心喪) 3년을 복(服)하 고 창의(創議)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과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건립(建立 ) 하고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과 문집(文集) 간행(刊行)에 전심(專心)하였다. 인 조 4년(1626년) 사축서(司蓄署) 별제(別提)를 제수(除授)받고, 인조 5년(162 7 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왕(王)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활인서(活人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