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page

- 77 - 참고문헌 :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광산이씨 성주파 연원록 ●이도(李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자소(子韶)이며 호는 현와(弦窩)이다. 가선대부 (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받고 완능군(完能君)에 봉해진 세 량(世良)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주(澍)의 딸인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사이에서 선조 26년(1593년) 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6세손이다. 광해군(光海君) 10년(161 8 년) 무오(戊午)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인조반정 (仁祖反正)으로 백형 심()이 복주(伏誅 :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되고 이괄 (李适)의 난으로 정국이 혼란하자 누대(累代)로 세거한 서울 명례방(明禮坊 :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를 떠나 처가인 합천 초계 성산(城山 : 현재 합천군 쌍 책면 성산리)으로 낙남(落南)하여 은둔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고령(高靈) 구담 (龜潭 :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서잿골)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37세 때 인 인조 7년(1629년) 고령의 의병장(義兵將) 송암(松巖) 김면(金沔)과 옥산(玉 山) 이기춘(李起春)을 향사하는 향현사(鄕賢祠 : 현재 道巖書院)의 중수기(重修 記)를 지었다. 44세 때인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수찬(修撰)에 제배(除拜)된 조카 이만(李曼)이 오랑캐와 화친(和親)할 수 없다고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전 예조참의(禮曹參議) 전식(全湜)이 의병(義兵)을 일으 켜 청군(淸軍)의 남하를 저지하려 할 때 공은 초계향병(草溪鄕兵)을 이끌면서 유사(有司)가 되어 군량의 효과적 이용계획을 제시하여 방어 작전을 도왔다 . 그는 전식(全湜)에게 영남의병이 성급히 조령(鳥嶺)을 넘다가 군량마저 적에게 빼앗기는 우(愚)를 범하지 말고 지역을 지키면서 관망하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 같은 해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권유로 청계서원(靑溪書院) 원장(院長)을 맡 았다. 55세 때인 인조 25년(1647년)에 창원(昌原)의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 ) 을 거쳐 58세 때인 인조 28년(1650년) 금산(錦山)에서 제원도(濟原道) 찰방(察 訪)을 수행하였고 61세 때인 효종 4년(1653년) 안동의 안기도(安奇道) 찰방(察 訪)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으로 돌아왔다. 75세 때 고령 반룡사(盤龍 寺)의 종각기(鍾閣記)를 지었다. 공의 집안은 백숙부(伯叔부), 자질(子姪), 사위 중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중앙 관료로 재임했던 분이 10여명이 넘는 당대의 명문가(名門家)이었다. 유고(遺稿)로 현와선생문집(弦窩先生文集)이 전한다. 현 와문집(弦窩文集)에는 약 730여 수의 한시(漢詩)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와(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