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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관여(寬汝)이다. 승지(承旨)를 증직(贈職)받은 계 환(啓煥)과 시문(時文)의 따님인 거창신씨(居昌愼氏) 사이에서 순조 1년(180 1 년) 태어났다. 아들 진두(鎭斗)가 정3품 상주진(尙州鎭) 좌영장(左營將) 겸(兼 ) 토포사(討捕使)를 지내 귀(貴)하게 되었으므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 ) 받았다. 고종 10년(1873년) 4월 28일 향년 73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촌 후록(後錄) 병향(丙向)이다. 초취(初娶)는 광국(光國)의 따님인 파주염씨(坡州廉氏)이고 재취(再娶)는 세항(世恒)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 이다. 참고문헌 : 기계유씨 대동보(정유보), 고령대관(1959년) ●윤리(尹理)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자일(子一)이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 ) 되었던 지선(止善)과 이종택(李宗澤)의 딸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다섯 번째 아들로 인조 14년(1636년) 태어났다. 효종 8년(1657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현종 4년(1663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成均館)에 출사(出仕)하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와 사간원(司諫 院) 정언(正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과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 1674년 서인(西人)으로 예송(禮訟)에 화를 입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77년에 경성판관(京城判官)에 제수되고,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후에 다시 장 령(掌令)으로 등용되었고 보사공신(保社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그 이듬해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나갔다. 그 뒤 병조(兵曹)와 형조(刑曹)의 좌랑(佐 郞)과 부승지(副承旨), 그리고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 국(己巳換局)을 만나 삭직을 당하고 양주 선롱(先垅)이 있는 곳에 은거하여 세 상과 인연을 끊었다. 1694년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았다. 숙종 20년(1694년) 졸(卒)하였다. 묘는 두천(杜川) 효성공(孝 成公) 묘전(墓前) 소좌을원(小左乙原)에 있다. 배위는 참봉을 지낸 의윤(義胤 ) 의 딸인 흥양이씨(興陽李氏)이다. 註1)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 숙종 6년(1680년)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