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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이광좌(李光佐)가 계청(啓請 : 임금께 아뢰어 청함)하여 봉상시첨정(奉常寺僉 正)에 구임(久任 : 일을 오래 맡김)되었다. 59세인 영조 15년(1739년) 임금이 친경례(親耕禮)를 행하려고 이에 하문(下問)하자 신농위차도(神農位次圖)를 바 쳤다. 그 후 연천현감(漣川縣監)이 되었다. 63세인 영조 19년(1743년) 봉상시 (奉常寺) 제조(提調) 원경하(元景夏)의 천거로 태상지(太常誌) 찬성(撰成)의 책 임을 맡았다. 64세인 영조 20년(1744년) 봉상시(奉常寺) 첨정(僉正)이 되었고 춘첩자(春帖子)와 영상시(迎祥詩)를 대전(大殿)에 지어 올렸다. 65세인 영조 2 1 년(1745년) 8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부안현감(扶安縣監)에서 체직(遞職)되었 으나 그후에 연일현감(延日縣監)에 제수(除授)되었다. 69세인 영조 25년(174 9 년) 6월 벼슬을 그만두고 고령(高靈)으로 돌아와 서둔록(筮遯錄)과 세진록(世辰 錄)을 지었다. 70세인 영조 26년(1750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경모하 여 가야산 기슭 고화동에(高花洞)에 ‘경운재(景雲齋)’를 지어 호를 ‘가야초수(伽 倻樵叟)’라 하고 은거(隱居)에 들어가 경학약설(經學略說)과 역리조해(易理粗 解)를 저술하고 시서정종후제(詩書正宗後題)와 문장곤월(文章衮鉞)을 찬술하였 다. 71세인 영조 27년(1751년) 이조판서 이주진(李周鎭), 병조판서 이천보(李 天輔), 이조참의 남태재(南泰齊), 승지 홍익삼(洪益三) 등이 천거하여 봉상시(奉 常寺)의 정3품 벼슬인 봉상정(奉常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72세 인 영조 28년(1752년) 6월 9일 고화동(高花洞) 경운재(景雲齋)에서 돌아가시고 같은 해 10월 10일 오시(午時) 고령현 서쪽 좌랑봉(佐郞峰)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1753년에 두기(杜機) 최성대(崔成大)가 선생의 세가(世家)를 찬하 고 1756년에 현후(縣侯) 정창유(鄭昌兪)가 유사(遺事)를 지었다. 1770년 참판 이미(李瀰)가 묘지명(墓誌銘)을 찬하였고 문인 이회근(李晦根)이 행략(行略)을 지었으며 1789년 문인 정원시(鄭元始)가 언행실록(言行實錄)을 찬하였다. 179 2 년 최성대(崔成大)의 손자 토목와(土木窩) 최중순(崔重純)이 행장(行狀)을 지었 으며 참판 홍재(洪梓)가 비명(碑銘)을 찬하였다. 저서로 1770년에 간행된 청천 집(靑泉集) 6권 3책과 1891년 간행된 청천선생속집(靑泉先生續集) 12권 5책이 전하며 문집 중 413수의 시가 전한다. 문인(門人)은 이조참판을 지낸 정원시 (鄭元始), 정난(鄭瀾), 진사(進士) 수백당(守白堂) 이회근(李晦根), 지촌(芝村) 박 이곤(朴履坤) 등 45명으로 파악된다. 배위는 호군(護軍) 정중(金鼎重)의 딸인 고령김씨(高靈金氏)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천집(靑泉集) 등 ●신평(申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