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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신유한(申維翰) 본관은 영해(寧海)이며 자는 주백(周伯)이고 호는 청천(靑泉)이다. 응재(凝齋 ) 태래(泰來)와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석현(碩玄)의 딸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 이에서 숙종 7년(1681년) 4월 15일 밀성(密城 : 현재 밀양) 죽원리(竹院里)에 서 태어났다. 가정이 빈곤하여 4세에 어머니에게 배움을 청하여 비파행(琵琶 行)을 암송하였으며 6세에 마을의 선생에게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을 배웠으며 시(詩), 유학(儒學)의 경전들과 함께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25세인 숙종 31년(1705년) 을유(乙酉) 증광(增廣)에서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그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31세 때인 숙종 37년(1711년 ) 가례비람(家禮備覽) 2권을 찬하였고 특히 두기(杜機) 최성대(崔成大)와 각별한 시교(詩交)를 나누어 사람들이 당의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의 사귐에 비 유할 정도였다. 33세인 숙종 39년(1713년) 계사(癸巳)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34세인 숙종 40년(1714년) 봄에 처향인 고령 양전리(量田里)로 거 처를 옮기고 경사(京師)와 호남을 오가며 명사(名士)들과 교유하고 김창옹(金昌 翁)과 교분을 맺었다. 37세인 숙종 43년(1717년) 비서저작랑(秘書著作郞)에 제 수되었고 39세인 숙종 45년(1719년) 4월 제술관(製述官)으로 통신사 (通信使 )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과 해유견문 록(海遊見聞錄) 등의 사행록(使行錄)을 저술하였는 바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 ) 즉 해유록(海遊錄)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함께 조선 기행문학(紀行文學)의 쌍벽(雙璧)이라 불린다. 40세인 숙종 46년(1720년 ) 1월 일본에서 돌아와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내며 김창집(金昌集)의 제청에 의하여 명을 받아 태상사지(太常寺志) 편찬에 착수하였다. 41세인 경종 1년(1721년)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제수(除授)되 었고 이듬해 무장현감(茂長縣監)이 되었다. 46세인 영조 2년(1726년) 봉상시첨 정(奉常寺僉正)에 올랐다. 47세인 영조 3년(1727년) 외직(外職)인 평해군수(平 海郡守)로 나갔다. 52세인 영조 8년(1732년) 선정(善政)을 베풀어 관찰사 이보 혁(李普赫)과 암행어사 한현모(韓顯謨)가 고을 원의 선정(善政)을 포장하는 계 문(啓聞)인 포계(襃啓)를 올려 포상(褒賞)하였다. 55세인 영조 11년(1735년) 이 하록(二何錄)을 지었다. 56세인 영조 12년(1736년) 검교(檢校) 봉상시판관(奉常 寺判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57세인 영조 13년(1737년) 영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