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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관직을 옮겨 어사잡단(御史雜端)에 이르렀으며, 청렴·충직하기로 이름이 났다 . 의종(毅宗) 초 시어사(侍御史) 송청(宋淸)과 함께 합문(閤門)에 엎드려 3일 동 안 시사(時事)를 논하였으나 회보(回報)가 없으므로 병을 구실로 사직하였다 . 예종 6년(1152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 내시(內侍 ) 윤언문(尹言文)이 괴석(怪石)을 모아 수창궁(壽昌宮) 북원(北園)에 가산(假山)을 쌓고 그 곁에 정자를 지어 사치가 심하였다. 이에 급사중(給事中) 임경(壬儆)과 더불어 소(疎)를 올려 윤언문 등을 파직시키기를 간하였다. 의종 12년(1158년 )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라 평장사(平章事) 최윤의(崔允儀), 동지추밀원사 (同知樞密院事) 김영부(金永夫)와 더불어 상춘정(賞春亭)에 나아가 성신(星辰 ) 에 제사지내고 비가 오기를 빌었다. 같은 해 6월 왕이 환관(宦官) 정함(鄭函)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하므로 간의대부 김양(金讓)·유공재(柳公材) , 중서사인(中書舍人) 홍원척(洪源滌), 기거사인(起居舍人) 김우번(金于蕃), 좌정 언(左正言) 허세수(許勢修) 등과 함께 소를 올려 이를 부당하다고 간하였으나 회보가 없으므로 홀로 대궐에 들어가 다시 간하자, 이에 왕이 정함(鄭函)의 벼 슬을 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탄핵한 일을 미워하여 수사공상서우복야(守司 空尙書右僕射)로 좌천(左遷)시키니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이 런 시를 지었다. 耕田消白日(경전소백일) 밭 갈면서 하루를 소일하고 採藥過靑春(채약과청춘) 약초 캐면서 봄날 보낸다네. 有水有山處(유수유산처) 산 있고 물 있는 이곳에서 無榮無辱身(무영무욕신) 영화도 없고 오욕도 없는 몸이라네. 곧 다시 소환되어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있다가 은퇴하고 의종 14년(1160년 ) 에 졸(卒)하였다. 참고적으로 신성용(申成用)을 시조(始祖)로 하는 고령신씨(高 靈申氏)와 연원(淵源) 및 보계(譜系)가 상이(相異)한 고령신씨(高靈申氏)가 이전 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파악되며 신숙(申淑) 계통의 후손 기록은 남아 있지 않 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