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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관전적(成均館典籍),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 과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 이듬해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弘文館直提學 兼侍講院輔德),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 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영경(柳永慶) 파(派)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선조 36년(1603년) 동지사(冬至使) 부사(副使)로 다시 명나 라에 다녀왔고, 선조 37년(1604년)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회재(晦齋)와 퇴계(退 溪)를 비판한 사람을 신변(伸辨 : 억울함을 변명하여 호소함)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논계(論啓 : 신하가 임금의 잘 못을 따져 아룀)하였다. 광해군 1년(1609년) 이듬해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 司諫)이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兵曹參判)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거 쳐 다시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인목대 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 다가 삭탈관직 되어 청송 진보(眞寶)로 돌아갔다. 1617년 고령 용담리(龍潭里 ) 로 돌아가 향약(鄕約)과 동규(洞規)를 지었고 매월 초하루마다 강회(講會)를 개 최했다. 1619년 고령군 운수면 연봉촌(延鳳村)으로 옮겨 살았다. 향리의 사람 들이 강학할 수 있는 집을 지어 주었는데 모덕와(慕德窩)라고 이름을 걸었다 . 광해군 14년(1622년) 8월 26일 향년 76세로 졸(卒)하였는데 묘는 성주 위곡 (蝟谷 : 현재 고령군 운수면 유리) 건진산(乾眞山) 묘좌(卯坐)에 있다. 1625년 대제학(大提學)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대제학(大提學 ) 백각(白閣) 강현(姜鋧)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숙종 4년(1678년) 사림 들이 동강(東岡)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顒)을 봉향(奉享)하기 위하여 세운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그 후 자손들이 역질(疫疾)로 인하여 지금의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로 이거하여 부조묘(不祧廟)로 받들고 그 마을 앞에 정사(精舍)를 건립하여 이름을 용담(龍潭)이라고 하였다. 저서는 관 혼촬요(冠婚撮要),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여해(六經蠡海), 상재만록(桑梓漫 錄) 등이 있었으나 공의 서재인 모덕와(慕德窩)가 불타는 바람에 모두 없어지 고 말았으며 1911년 후손 인현(寅鉉), 윤현(允鉉) 등에 의해 간행된 용담집(龍 潭集) 7권 3책이 전할 뿐이다. 배위는 참판(參判) 응복(應福)의 딸인 정부인(貞 夫人) 충주박씨(忠州朴氏)이다. 참고문헌 : 만력1년계유2월24일사마방목, 선조실록, 광해군실록, 용담집 순천박씨 판윤공파 파보(갑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