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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2 -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국권 회복 운동으로 1907년 2월에 대구에서 공식화되 었다. 1907년 1월 부산상무소[회두: 서상돈]에서 처음 논의되어 1907년 1월 2 9 일 대구관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 등 16명이 발기하여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발송하였고 이후 전국 각 처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 중앙 민족지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대한자강회·신민회·서우학회·한북흥학회 등 계몽 운동 단체들의 적극 적인 호응이 있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 함으로써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일반 국민들의 국채 보상 운동 참여는 자발적이고 열성적이어서 190 7 년 2월 말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서 국채보상기성회·단연회·국채보상동맹·단연동맹 등이 조직되어 단연을 실행하고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국채보상기성회·패물폐지부인회·국채 보상탈환회 등을 조직하여 패물을 헌납하였고, 심지어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여 학생들도 있었다. [설립목적]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국채 보상을 위해 고령 지역에서 의연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변천] 1907년 3월 13일 조직되었다. [활동사항]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고령 유생 이규신(李奎紳)·이인재(李寅梓)·이상희(李相羲 ) 등이 발기하였다. 회의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연설에 이어 이규신이 100원 을 먼저 의연하자 군민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순식간에 1,000여 원이 , 수일 만에 수천 원이 모였다. [의의와 평가]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고령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권 회복 운 동을 대중 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이상근,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연구」(『국사관논총』, 국사편찬위원회, 1990) 권대웅, 「한말 한주학파의 계몽운동」(『대동문화연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