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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0 - [역사적 배경]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 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 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 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걸은 민족 자결 주의도 식민지 피억압 민족에게 독립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 일제는 강제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 ‘군사적 제국주의’ 차원의 폭력 성이 내포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 구조의 구축 작업 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식민지 조선의 금융 지배를 위해 화폐 정리 사업을 착수하였다. 근대적 운송망의 구축 역시 일제가 일찍부터 착수한 것인데, 경부 선 철도의 부설이 그것이다. 이에 고령은 낙동강 수운을 통한 경제 활동에 타 격을 입게 되었다. 또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해 일제 자본의 자유로운 농촌 침투와 그 지 배를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령 지역의 많은 토지 소유권이 일제로 바 뀌는 결과를 낳음과 동시에 식민지 지주제가 관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이런 정책의 온전한 수행을 위해 모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 에서 일제의 폭압성과 강제력이 자행되어 지역민은 수탈과 지배를 받는 고통 을 겪게 되었다. [경과] 3·1운동의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때 고령 지역에서는 3월 하순 두 차례 만세 시위운동이 있었다. 4월 들어서는 고령군 우곡면에서 만세 시위운 동이 계획되었다. 우곡면 야정리의 박재필(朴在弼)이 도진리의 박영화(朴英華 ) 와 박차천(朴且千)을 비롯한 농민 30여 명을 규합하여 4월 6일 밤 11시 무렵 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돌고 난 뒤 면사무소로 행진을 시도하였다. 다음 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박재필·박영화·박차천 등이 체포되었다. 4월 8일에는 도진리의 박기태(朴基太)의 집에서 결혼 잔치가 열렸는데, 일제 경 찰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면사무소 앞으로 강제 집합시킨 뒤 시국 강연을 하였다. 강연 뒤 박채환(朴採煥)이 귀가하는 동민들에 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역 설하였다. 그와 동민들 사이에 독립 의지가 확인되자 박채환이 만세를 선창하 고 군중이 크게 호응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경에 의해 군중은 해산되고 박 채환은 체포되었다. 도진리 사건을 지켜보고 격분한 박기로(朴基魯)는 우곡면 대곡리에서 한이 군(韓二君)·한용발(韓用發)·도말용(都末龍)·박용학(朴龍鶴)·한광룡(韓光龍) 등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