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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5 - 고령청년회관에서 신철휴의 개회 선언으로 추가로 가입한 13명을 포함한 65명 의 회원 중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임시 의장 박계삼(朴桂三), 기록 서기 유영식(兪永植), 사찰 김시병(金始炳)을 선출하고 신간회 본부에서 파견된 박동완(朴東完)의 축사에 이어 임원을 선출하 였다. 선출된 임원은 구체적으로 회장 변희용, 부회장 박계삼, 서무부 총무 간 사 김종기(金鍾基)·신철휴, 조사연구부 정치문화부 유우식(兪佑植)·배수동(裵壽 東), 재무부 정운목(鄭雲穆)·이병춘(李炳春), 이상봉(李相鳳)·김욱배(金郁培), 선 전부 김삼도(金三道)·이상용(李尙用), 간사 김시병(金始炳)·정운목(鄭雲穆)·박장오 (朴章悟)·최영돈(崔永敦)·유봉완(兪鳳完)·김재순(金在舜) 등이었다. 1929년 8월 10일 임원을 개선하고 집행 위원장으로 신철휴·이상봉·변희용·이 병춘·김종기·유우식·유용목·이장오·박계삼·배수동·이균영, 후보로 이무삼(李武 三)·김재순·김원현(金元賢)·김성문(金星汶), 검사위원으로 이경호·김욱배 등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 본부가 해산된 뒤 신간회 고령지회도 해산 되었다. [활동사항] 신간회 고령지회는 회장 변희용 이하 65명의 회원으로 출범했으며 창립 초기 인 1927년 10월 2일 간사회를 열고 “세는 지주가 부담한다, 소작 기간을 연장 하여 기한 내 임의로 개작하지 못한다, 악행을 행하는 사음(舍音)을 면임(免任 ) 케 한다, 소작료 운반 거리 10리 이상이면 지주가 운임을 지불한다” 등 소작 문제를 거론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여 군내에 있는 지주들에게 배포하면 서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같은 해 10월 3일에는 조선공산당 공판에 대 해 변호사에게 격려문을 발송하기로 결의하는 등 정치 운동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고령문화사대계』 1-역사편(고령군 대가야박물관·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 2008) 『조선일보』 (1927. 8. 29, 1927. 9. 24, 1927. 10. 3, 1927. 10. 8, 1929. 1. 21, 1929. 8. 15) 『중외일보』 (1928. 8. 4, 1929. 2. 17, 1929. 2. 21, 1929. 4. 19, 1929. 8 . 19)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