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page

- 364 - 교도가 희망하던 시기에 도달하였다. 신도는 차제에 죽음을 각오하고 운동에 전력하려 한다. 귀하도 조선인이다. 행동을 같이 하자”고 권유함으로써 체포되 었다. 서병직(徐丙稷), 최홍석(崔洪錫), 전하성(全夏誠) 등에게 독립의거 궐기를 종용하다가 검거되어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0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 으며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6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 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 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 1971년) ●홍영희(洪永熹)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아버지 말룡(末龍)과 이두천(李斗千)의 딸인 이남이(李 南伊) 사이에서 차남으로 1919년 11월 14일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198번지에 서 태어났다. 일본 정강현(靜岡縣) 소진상업학교(沼津商業學校)를 졸업하였다 . 해방 후 개진면사무소에 근무하다가 고령경찰서 관할하 각지서(各支署) 주임 (主任)을 두루 역임하였다. 자유당 고령군지부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56년 8 월 8일 시행된 제2대 경상북도 도의원[참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도 의원(道議員)에 당선되었다. 1987년 2월 18일 향년 69세로 졸(卒)하였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