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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9 - 인 월성최씨(月城崔氏) 사이에서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 168번지에서 1864년 8월 3일 태어났다. 고향에서 거주하면서 대구· 합천 등지에서는 독립 만세 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는데도 유독 고령군 쌍림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4일 오성렬(吳聖烈)의 집에서 서병직 (徐丙稷)을 만나, 날짜를 정하여 군민 궐기 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3월 27일에는 이준이(李俊伊)의 집에서 최홍석(崔洪錫)에게, 3월 28일에는 쌍림면 신촌리에 사는 전하성(全夏誠)에게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규합하였다 그러 나 계획이 도중에 탄로되어 검거됨으로써 쌍림면의 만세 시위운동은 중단되고 말 았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 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 역 1년을 받게 되어 상고하였으나 5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형의 옥 고를 치렀다. 1927년 11월 27일 향년 64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거물산(巨物 山) 자좌(子坐)에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고령문화사대계 1-역사편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년) ●최곤술(崔坤述)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경순(敬純) 또는 자강(子剛)이고 호는 고재(古齋 ) 이다. 진릉참봉(眞陵參奉)을 지낸 창수(昌粹)의 장남으로 고종 7년(1870년) 5월 17일 태어났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경상관찰부(慶尙觀察府)가 실시한 영재선 발시험(英才選拔試驗)에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여 영남(嶺南) 13영재(英才)로 선발된 후 낙육재(樂育齋)에서 3년간 수학(修學)하였으며 고령향교내에 만하(晩 霞) 이봉조(李鳳朝)가 설립한 사립(私立) 명륜학원(明倫學院) 교장(校長)과 전교 (典校)를 역임하였다. 35세인 1904년 대한제국 때에 둔 비서원(秘書院)의 정 3 품 관직인 비서승(祕書丞)에 임명되었으나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 ) 에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불취(不就)하였으며 경술국치 (庚戌國恥) 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더불어 일생을 보냈 다. 1925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글을 모아 현존 최고(最古) 문집 인 고운집(孤雲集) 상•하권 양권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중간(重刊)하였다 . 1936년에서 1937년까지 합천군 가야면 홍유동에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사당 (學士堂) 이전 및 건축 시 주재(主宰)하였으며 1949년부터 1951년까지 가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