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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2 -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호는 금성(金城)이며 영택(永宅)의 아들로 1902년 고 령군 쌍림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해인사(海印寺)에서 한문을 수학하 다가 서울중앙고보를 거쳐 도일(渡日)하여 1926년 일본 도쿄에서 재일본조선 불교청년회라는 재일(在日) 유학승(留學僧) 모임에서 간부를 맡았고, 기관지인 《금강저》 발행에도 참여했다. 1928년에 와세다 제1고등학원을 졸업했고, 곧바 로 와세다 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수학했다. 1932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 고 귀국하여 경성부에서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서기장에 취임한 뒤 활발한 활동 을 했다. 그러나 1년여의 활동 끝에 하동의 쌍계사로 내려와 몇 년간 수행 생 활에만 몰두하며 은거했다. 다시 외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6년에 쌍계사 주지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으면서부터이다. 주지 임기는 다 채우지 않고 1939년에 사임했으며, 이후 불교 잡지인 《불교》 편집주임으로 활동했다 . 일제 강점기 말기에 《불교》를 발행하면서 친일 시사문을 다수 싣고 직접 집필 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지원한 행적이 있다. 조선 불교계가 신도들의 모금으로 군용 비행기를 헌납하기로 한 결의안 전문을 일본어로 게재하고 헌납금을 내 도록 안내하기도 했다. 공이 기고한 글에는 태평양 전쟁이 황인종의 복음이라 거나 황군 장병의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고, 특히 ‘황도 불교의 선양’을 주창하여 불교의 친일적 변질을 도모했다. 광복 후에도 194 6 년 《신생(新生)》이라는 불교 잡지를 창간해 발행하면서 불교 언론인으로 계속 활동했다. 《신생》은 이듬해 《불교(佛敎)》로 제호(題號)를 바꾸었다. 1949년에 일어난 총무원장 박원찬 감금 사건에 가담하기도 했다. 동국대학교(東國大學 校) 이사장(理事長)을 역임하다가 6.25 전쟁 때 실종되어 소식을 알 수 없다 .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 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 고령의 현대사(고령문화원, 2014년), 고령대관(1959년), 위키백과 ●장상길(張相吉) 본관은 인동(仁洞)이며 족보명은 상식(相植)이다. 아버지 영택(永宅)과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1922년 태어났다. 1949년 경찰에 투신(投身)하여 영천(永川), 칠곡(漆谷), 달성(達城), 대구(大邱) 등 일선 경찰서장(警察署長)을 두루 역임(歷任)하였으며 경북지방경찰청 경무과장(警務課長) 및 경남지방경찰 청 경비과장(警備課長)을 지냈다. 1988년 5월 20일 향년 67세로 졸(卒)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