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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0 - 써 높고 원대한 경지에 나아갈 것을 권면(勸勉)하였다. 공은 또 당대의 석학 (碩學)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공산(恭山) 송 준필(宋浚弼), 수산(壽山) 이태식(李泰植), 제서(濟西) 이정기(李貞基) 등 여러 선학(先學)들에게 직접나아가 배움을 청하고 혹은 편지로 질정(質正)하여 학업 의 진전(進展)을 구하였으니 호학자(好學者)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마침내 문원 (文苑)의 거벽(巨擘)이 되었다. 영남 일대에 1,200여수(餘首)의 서문(序文) 및 갈문찬(碣文撰)이 산재(散在)되어 있으며 서예(書藝)의 필치(筆致)도 주경(遒勁 ) 하여 공이 쓴 비문(碑文)과 편액(扁額)이 전역에 두루 퍼져 있으며 대문자(大文 字)의 대가(大家)이었다. 1978년 중재(重齋) 선생이 내당서사(內塘書舍)에서 별 세하였는데 공이 상장례(喪葬禮)의 모든 절차를 주관하고 묘지명(墓誌銘)을 지 었다. 모년(暮年)에 문인(門人)들이 수계(修契)하고 미강정사(薇岡精舍)를 옛 터 에 짓고 문집 12권 6책을 간행하였다. 2001년 8월 12일 향년 91세로 졸(卒)하 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관동촌후(館洞村後) 조양곡(朝陽谷) 신좌(辛坐)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영일(迎日) 정직교(鄭直敎)가 지었다. 배위는 성주이 씨(星州李氏) 태희(泰熙)의 딸이다. 참고문헌 : 진와속집(進窩續集),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이호동(李鎬東)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처사(處士) 중세(重世)와 한호(瀚鎬)의 딸인 의성김씨 (義城金氏) 사이에서 1937년 태어났다. 1963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69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7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후 1968년 국제기능올림픽 심사위원을 거쳐 1971년 공화당 중앙위 운영위원 과 1973년 경남대 경영대학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79년 공화당 청년분과 위 원장을 거쳐 1980년 8월 13일 유정회(維政會) 소속 최경록(崔慶祿) 의원(議員 ) 이 주일(駐日) 일본대사(日本大使)로 임명되어 의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유정회 (維政會) 예비후보(豫備候補) 3번으로 공이 10대 국회의원직(國會議員職)을 승 계(承繼)하였다. 그 후 경원대(暻園大) 교수로 재직 중 1986년 3월 18일 교통 사고로 졸(卒)하였다. 묘는 천안 풍산공원묘지에 있다. 배위는 인동장씨(仁同張 氏) 선자(宣子)이다.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파보(경인보), 매일경제(1980.08.13.) ●이홍직(李洪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