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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을 납치해가자, 중종 30년(1535년)에 영건만호(永建萬戶)로서 전투에 참가하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명종 1년(1546년) 동래현령(東萊縣令)이 되어 그해 관리로서 근면, 절검하고 특히 치민(治民)에 힘써 가자(加資)되었다. 1549년에는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어 구황(救荒)에 힘써 왕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았고 함허정(涵虛亭)을 중건(重建)하니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기 문(記文)하였다. 명종 6년(1551년) 염근인(廉謹人)으로 녹선(錄選)되었다.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이명(移命)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응거도(伊應巨島)에 축성(築城)하였는데 모해(謀害)로 파직(罷職)되었다가 명종 10년(1555년)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을 때 남해 안에 침입하여 대패하고 쫓겨 가던 1,000여 명의 왜적이 제주를 기습하자, 제 주목사로서 정예병 70명을 뽑아 적진에 돌입시켜 용전(勇戰)을 벌이게 함으로 써 많은 적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전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제 주(濟州)에 망경루(望京樓) 누각을 창건(創建)하였다. 이듬해 6월 다시 왜적선 5척이 침입하자 이를 격침하고 적의 머리 130여 급을 벤 공으로 또 가자(加 資)되었으며, 1558년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어 도순 변사(都巡邊使)로 제수되어 경상(慶尙)•전라(全羅)의 군사를 장악하고 제승방략 (制勝方略)을 창안하여 시행하였다. 1565년 한성판윤(漢城判尹)에 특진(特進)되 고, 같은 해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여러 번 호인(胡人) 의 침입을 격퇴하여 북변방어(北邊防禦)에 공을 세웠다. 선조 1년(1568년) 7월 24일 향년 65세로 졸(卒)하였다. 3대추작지은(三代追爵之恩)을 받았다. 묘는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 신양촌 좌록(左麓) 축좌(丑坐)에 있다. 배위는 진(震)의 딸인 창녕성씨(昌寧成氏)이다. 註1) 구황(救荒):흉년 등으로 말미암아 굶주림에 빠진 빈민(貧民)을 구제하는 일 註2) 표리(表裏):은사(恩師)나 헌상(獻上)하는 옷의 겉감과 안집 註3) 염근인(廉謹人):근면한 업무 수행으로 백성들에게 실제 혜택을 주는 관리 註4) 녹선(錄選):벼슬 등에 추천되어 관리로 뽑힘 註5) 제승방략(制勝方略):조선시대 야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함경도 8진(鎭)과 이에 소속된 각 보(堡)의 방수(防戍)를 논한 병서(兵書) 註6) 3대추작지은(三代追爵之恩):돌아가신 아버지 조부, 증조부 등 3대에 걸쳐 사후(死後)에 관직과 작위를 높이는 은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