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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4 - 서 수학(修學)하던 바 경술합방지치(庚戌合邦之恥)를 당(當)하여 뜻을 세우고 서울에 유학하여 신학(新學)을 전수(專修)하였으나 일제하(日帝下)의 취임(就任 ) 을 부끄러이 생각)하고 향리(鄕吏)에 돌아와 1920년 7월 3일 공을 비롯하여 이상봉(李相鳳)·이정근(李正根)·김종기(金鍾基) 등의 발기로 창립된 고령청년회 (高靈靑年會)에서 노동야학(勞動夜學)을 통한 문맹퇴치운동(文盲退治運動), 물 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에 힘쓰고 청년회관(靑年會館) 건립(建立)에 앞장서고 지방(地方) 청년(靑年)들의 민족정기(民族正氣)를 고무(鼓舞)시키는데 힘썼으며 1927년 9월 12일 창설된 신간회(新幹會) 고령지회(高靈支會)의 신간회운동(新 幹會運動)에 참여(參與)하였다. 1932년 고령청년동맹(高靈靑年同盟)의 많은 부 채(負債)로 인하여 고령청년회관(高靈靑年會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자 채권 자(債權者)로서 거액의 부채를 탕감(蕩減)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933년 1월 2일 전조선인지주대회(全朝鮮人地主大會)에 참석하여 40년이상 충실한 소작농 (小作農)은 자작창설(自作創設)할 것과 소작료는 5할로 하되 공과금은 법규상 당연히 지주가 부담할 것을 주장하여 소작농의 권익을 보호하였다. 도의제도 (道議制度)가 실시(實施)되자 1933년 봄에 군민(郡民)들의 추천(推薦)과 절대적 (絶對的)인 성원(聲援)으로 도의원(道議員)에 당선(當選)되어 제1차 도의회(道議 會)에서 낙동강(洛東江) 가교(架橋) 설치를 필사적인 노력으로 통과시켜 193 5 년 9월 29일 고령교(高靈橋)를 준공(竣工)하게 하여 삼도교통(三道交通)에 일 대편의(一大便宜)를 제공하였다. 1934년 8월 고령군 8면 중 4면이 전멸되는 낙동강 대수난(大水難)으로 인한 참상을 보고 고령군에 3천명의 요구재민(要救 災民)이 발생하자 고령의무저곡설금(高靈義務貯穀稧金)을 활용하여 형편에 따 라 지불하는 등 지방발전(地方發展)과 민족권익대변(民族權益代辨)을 위(爲)하 여 헌신(獻身)하였다. 1973년 4월 13일 향년 79세로 서울에서 졸(卒)하였다 .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 3번지 선영하(先塋下)이다. 비명(碑銘)은 전직 국회의원 김해(金海) 김홍식(金洪植)이 근찬(謹撰)하고 하였다. 초취(初娶)는 진 사(進士) 재헌(在憲)의 딸인 현풍곽씨(玄風郭氏)이고 재취(再娶)는 상계(相契)의 딸인 안정나씨(安定羅氏)이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34년 12월 8일),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이정근(李正根)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상식(尙植)이고 호는 송산(松山)이다. 고령군수(高 靈郡守)를 지낸 봉조(鳳朝)와 최원(最元)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거창장씨(居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