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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2 - 강점기(日帝强占期)에 고령지역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4년 8월 18일 향 년 57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금암 수락동 선영 청룡등 진좌(辰坐)에 있다. 유고(遺稿) 3권이 전한다. 1995년 8월 15일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배 위는 춘석(春錫)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벽옹 김창숙 일대기(심산사업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유림의 독립운동,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이인재(李寅梓)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여재(汝材)이고 호는 성와(省窩)이다. 미강(薇岡 ) 종발(鍾發)과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지관(志觀)의 딸인 영산신씨(靈山辛氏)사 이에서 고종 7년(1870년)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입암(立巖) 남정우(南廷瑀)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어려서는 재종질(再從姪)되는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에 게 배웠다. 나이도 14살 많고 학문도 앞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고종 26년 (1889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고령의 천년고찰(千年古刹)인 반룡사(盤 龍寺)에 머물고 있을 때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주선으로 백형(伯兄) 인 표(寅杓)와 함께 배알(拜謁)하고 곽종석(郭鍾錫)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25세 때는 대가야읍 내곡(乃谷)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에 정진하면서 홍와(弘窩) 이 두훈(李斗勳)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영향으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 相)의 학문을 계승하여 한주(寒洲) 주리론(主理論)을 그의 학문적 주장의 근거 로 삼았으며 특히 한주(寒洲)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변법자강론자(變法自强論者)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 淵)과 교유하면서 신사조(新思潮)에 눈을 뜨게 되었으나 결정적으로 신사조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과 1910년 경술국치(庚 戌國恥)를 경험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서구(西歐) 열강(列强)이 부강(富强)해진 배경에는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처음에는 서양의 헌법과 행정에 관한 책을 구하여 읽었다. 그러나 지식이 축적되면서 모든 제도는 고유한 철학 (哲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결론에 따라 희랍철학(希臘哲學)을 연구하여 초 기 서양철학 연구서 가운데 가장 체계를 갖춘 업적으로 평가받는 ‘고대희랍철 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을 내기도 하였다. 또한 향리에 하산정사(霞山精舍 ) 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1909년 고령에 자치민의회(自治民議會)를 조직하 였고 이를 바탕으로 영신학교(靈新學校)를 설립하는 등 1929년 사망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