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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1 - 근무하다가 1964년 고령여중고 설립시 초대 교장(校長)으로 부임하였다. 25년 교직 생활 중에서 고령중ㆍ농고ㆍ여중고 등 세 학교에서 초대 교장으로 열악한 지 역 교육 여건 개선과 후진 양성에 15년간 헌신하였던 애향(愛鄕)의 진정한 교육자 (敎育者)이었다. 1969년 9월 22일 향년 6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 야읍 내상리 장자곡(長子谷)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 리기 위하여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을 수여하였으며 2010년 6월10일 대 가야읍 쾌빈리 소재 고령중학교 교정에 공의 지역 교육발전에 헌신했던 공 적을 오래토록 기리고자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아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이인광(李寅光)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중실(仲實)이고 호는 손암거사(遜菴居士)이다. 아 버지 호발(皥發)과 태운(泰運)의 딸인 어머니 성산전씨(星山全氏) 사이에서 고 종 15년(1878년) 7월 6일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228번지에서 태어났다. 홍 와(弘窩) 이두훈(李斗勳)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문하(門下)에서 수학(受 學)하였다. 천자(天資)가 영오(穎悟)하고 풍의(風儀)가 늠늠(凜凜)하여 어릴 때 부터 장래가 성취(成就)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두 분 선생님 문하에서 수업하 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망극(罔極)하자 솟구치는 열혈(熱血)을 진정(鎭定)할 길이 없어 일신(一身)을 나라를 위해 바칠 각오를 하던 중에 42세의 장년(長年)으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 動)을 당하여 온 마음과 온 힘을 한곳에 모아 만세를 크게 외쳤다. 1919년 3 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곽종석(郭鍾 錫), 김복한(金福漢)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 한 연서자(聯署者) 137명중 52번째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 하였다.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被逮)되어 사건의 전모 가 드러나면서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나 1919년 4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기소유예 (起訴猶豫) 불기소(不起訴) 처분(處分)을 받고 풀려났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 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이밖에도 공은 소비자의 권익을 보 호하고 신장시킬 목적으로 1922년 8월 고령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고령소비조합 (高靈消費組合) 창립총회(創立總會)에서 이사(理事)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에 는 공이 주도하여 고령 내산서당(乃山書堂)에서 스승인 홍와(弘窩) 이두훈(李斗 勳)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3권 7책의 홍와문집(弘窩文集)을 발행하는 등 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