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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들어갔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추모 하여 지동암(志同岩) 밑에 허물어진 두 선생의 강학지소(講學之所)를 중수(重 修)하고 삼수정(三樹亭)이라는 학당을 짓고 경서(經書)을 가르침에 부근에서 많 은 선비들이 모여 들어 문풍(文風)이 진작(振作)되었다. 명종 3년(1548년) 고향 으로 돌아와 향림정(香林亭)을 창건(刱建)하여 강학지소(講學之所)로 삼아 재주 에 따라 가르쳤다. 고령지역 최초로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의 4가지 덕목 (德目) 중 실천가능한 10조를 엄선(嚴選)하여 향약(鄕約)으로 계(稧)를 만들어 규약(規約)을 세우고 생활화(生活化) 하도록 힘껏 가르치니 몇 해 만에 골짜기 의 백성들이 생각과 생활이 변하여 부지런하고 형제가 우애하며 부모를 사랑 하고 이웃을 서로 도와 선(善)을 장려하고 악(惡)을 규제하는 등 아름다운 생 활 모습으로 변하니 향중(鄕中)이 모두 선생을 더욱 존경하였다고 전해진다 . 아버지가 와병(臥病)중일 때 단지헌혈(斷指獻血)하는 등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따라 정성을 다해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재직 시 퇴계 (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홍시(紅柿)를 대접받고 그 감씨를 얻어 와서 고향인 모산골에 심어 유명한 고령 수시(水柿 : 물 감)를 보급시켰으며 후에 임금님의 진상품(進上品)이 되었다. 명종 14년(1559년) 기미년 4월 10일 월기 재사(齋 舍)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7세였고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우암(寓巖) 선생 인규(仁奎)의 딸인 풍 양조씨(豊壤趙氏)이다. 지방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 기재(棄齋) 선생의 학문 (學問)과 덕행(德行)을 기릴 것을 청하여 영조 12년(1787년) 창건되어 우곡면 사촌리에 소재한 영연서원(靈淵書院)에 기배향(旣配享)된 순은(醇隱) 신덕린(申 德隣),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외에 추향(追享)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후 직장공파보(무자보), 고령대 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중종실록 ●김수문(金秀文)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성장(成章)이고 호는 양촌(陽村)이다. 정헌대부(正 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증직(贈職)받았던 수(銖)와 정부인(貞夫人) 강양이씨(江陽李氏) 사이에서 연산군 10년(1504년)에 태어났다. 재종숙(再從叔) 진사(進士) 임(銋)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중종 때 무 과(武科)에 급제한 후 야인(野人 : 女眞人)들이 함경도 종성에 침입하여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