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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7 - 서 주인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을 면임(免任)케 한다. 소작료 운 반 거리가 10리 이상이면 지주가 운임을 지불한다” 등 소작문제를 거론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여 군내에 있는 지주들에게 배포하면서 소작쟁의운동 (小作爭議運動)을 전개하여 악덕 지주(地主)의 횡포(橫暴)로 부터 경제적(經濟 的) 약자(弱者)인 소작농(小作農)의 지위를 적극 보호하였다. 그리고 1941년 고령면장 재직 중 분산되었던 고령시장을 통합하여 현재 고령종합시장이 위치 한 고령읍 지산리 222-2번지로 옮겨 5일 재래시장(在來市場)의 활성화(活性 化) 및 현대 상설시장(常設市場)의 모태(母胎)를 제공하였다. 개혁적(改革的 ) 유학자(儒學者)로서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서 산업을 진흥하는 등 민족의 실력 을 키워 국권을 회복하자는 경제적 구국운동인 식산흥업운동(殖産興業運動)에 도 앞장 서 지역 상인들에게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일깨웠다. 공은 계몽운동가 (啓蒙運動家)와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또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상공인(商 工人)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1962년 4월 7일 향년 73세로 졸(卒)하였다. 묘 는 고령읍 장기리 산 20-2번지 선영에 있다. 2012년 3월 31일 문중에서는 일 제강점기에 다방면에 걸쳐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삼주(三 洲) 이동제(李東濟) 선생 계몽운동(啓蒙運動) 현창비(顯彰碑)’를 세웠다. 배위는 여옥(汝玉)의 딸인 진양하씨(晋陽河氏)이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21년 4월 3일), 고령군지(1996년), 고령문화사대계1(역 사편) ●이상의 (李相義)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양(伯陽)이다. 고종 17년(1880년) 고령군 대가야 읍 내상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찾아 뵙고 처 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추는 속수지례(束脩之 禮)를 행하고 제자가 돼 학문을 전수(傳受)받아 유학자로서 명성이 인근 지역 에 널리 알려졌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國權)을 상실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 오매(寤寐)에도 조국 광복에 마음과 정 성(精誠)을 다하던 중 1919년 전국 유림이 비밀리에 파리평화회의(巴里平和會 義)에 자주독립을 청원하는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했던 유림의거(儒林 義擧)에 즈음해 연서자(聯署者) 137명중 78번째, 고령 출신 서명자 중에는 같 은 내상동에 살았던 이인광(李寅光)에 이어 3번째로 서명했다. 그 후에 사문(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