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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6 - 隱)’을 읽어보면 20세 이전부터 두 분은 문묵(文墨)의 교유(交遊)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만하(晩霞)의 서예(書藝)가 상당한 경지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은 유불(儒彿)을 겸비한 교양인(敎養人)으로서 교육 사업과 유학 진작 및 군민을 위하여 다방면(多方面)의 업적을 남겼으며 1937년 7월 6일 향년 7 7 세로 졸(卒)하자 공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고령군 최초 군민장(郡民葬)’으로 장례를 치루었는데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목은 애도(哀悼)하는 수많은 인파(人 波)로 길을 메웠다. 묘는 고령군 고령읍 지산2동 산3번지 월기(月器) 안산 북 향 정좌(丁坐)에 있다. 초취(初娶)는 최원(最元)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거창장 씨(居昌章氏)이고 재취(再娶)는 숙부인(淑夫人)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참고적 으로 동생 봉주(鳳周)도 고령향교(高靈鄕校)의 전교(典校)인 직원(直員)을 맡았 으며 손자인 홍직(洪直)이 전교(典校)를 지내 조손(祖孫)간에 전교(典校)를 지내 향풍교화(鄕風敎化)와 고령향교(高靈鄕校)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註)공함(公函):공무에 관(關)하여 주고받는 문서(文書)를 말한다 참고문헌: 고령군지(1959년). 고령문화사대계 1 역사편,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 보(병신보) ●이상봉(李相鳳)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족보명은 동제(東濟)이고 호는 삼주(三洲)이다. 유학(幼 學) 인호(仁浩)와 남철(南喆)의 딸 사이에서 철종 12년(1890년) 외아들로 대가 야읍 쾌빈동 513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英特)하고 용모 가 장중(莊重)하였으며 기상(氣像)이 훤칠하고 성품이 강직(剛直)하여 공사(公 私)간에 터럭만큼도 편파적(偏頗的)인 일을 행하지 않아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 하였다고 한다. 1920년 7월 3일 유우식(兪佑植), 이정근(李正根) 등과 함께 발 기인으로 참여하여 고령청년회(高靈靑年會)를 조직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 서 노동야학(勞動夜學) 교사(敎師)로 부임하여 미취학 아동, 청년 여성을 대상 으로 문맹퇴치운동(文盲退治運動),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 등 문화운동과 토론회,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사회교육(社會敎育)과 민중계몽(民衆啓蒙)에 앞 장섰다. 1927년 9월 12일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고령지회(高靈支會) 창립시 조사연구부장(調査硏究部長)으로 임명된 후 1929년 8월 10일 집행위원장(執行 委員長)으로 선출되었다. “세(稅)는 지주(地主)가 부담한다. 소작기간을 연장하 여 기한내 임의로 개작(改作)하지 못한다. 악행을 행하는 사음(舍音 : 마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