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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5 - 월 고령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인 사립 우신학교(又新學校)를 설립하여 초대 교 장(校長)을 맡았으며 1909년 8월 14일 교장 이봉조(李鳳朝), 교감 서병근(徐丙 根), 학감(學監) 유봉화(兪鳳華)가 내었던 단연회(斷煙會) 의연금(義捐金)을 단 연회(斷煙會)로부터 되돌려 받아 전액(全額)을 학교 운영기금(運營基金)으로 사 용하였다. 1909년 3월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등과 지방자치제(地方自治 制)를 위해 설립한 단체인 고령군 자치민의소(高靈郡 自治民議所) 발기인(發起 人)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경신년(庚申年) 대홍수(大洪水)로 수백 명의 이재 민(罹災民)이 발생하자 자신의 가옥을 개방, 거주케 하고 식량까지 공급하였으 며 그후 특히 자신의 농토를 전액 희사(喜捨)하여 지금의 연조3리에 터를 닦아 집을 지어 살게 하였다. 이곳이 ‘새동네’로 일컬어진 것은 그 때부터이며 지금 도 연조 3리는 공이 만든 동네로 인식되고 있다.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 이후에 느낀 바 있어 사립(私立)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여 장래의 영재 (英材)를 가르쳐 기르는 교육사업에 진췌(盡悴)하였으며 1920년 7월 3일 고령 청년회(高靈靑年會) 설립시 물적지원(物的支援)을 아끼지 않았다. 1921년 향교 (鄕校)의 전교(典校)인 직원(直員)을 맡아 유교단체인 모성계(慕聖契)를 조직하 고 고령향교의 문묘(文廟)를 중수하였으며 향약(鄕約)을 만들어 향촌(鄕村)의 기강(紀綱)을 진작시켰고 1922년 5월에는 남채우(南采祐) 등과 관음사(觀音寺 ) 의 법당인 관음전(観音殿)을 신축하였고, 1928년 반룡사(盤龍寺)의 만세루(萬 歲樓)와 스님들이 생활하는 건물인 요사(僚舍) 등을 중수(重修)하였으며 193 1 년 8월에는 신순일(申順一), 장선운(張禅雲) 등과 발기하여 칠성각(七星閣)을 준공하는 등 고령지역의 유교(儒敎)와 불교(佛敎)를 진흥(振興)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수리사업(水利事業)에도 힘을 쏟아 그 송덕비(頌德碑)가 190 8 년 8월 가라평보(伽羅坪洑) 가운데 세워졌으나 그후 이건(移建)하여 현재 고령 군청내에 세워져 있다. 경신년(1920년) 대수재(大水災) 복구(復舊)와 농촌진흥 (農村振興)을 위하여 1922년(임술년) 가을부터 권병선(權丙宣) 고령군수와 공 의 노력으로 ‘고령저곡실시공려회(高靈貯穀實施共勵會)’를 조직하여 군내 전농 가를 가입시켜 고령군 각 농가에 절미(節米) 저축을 12년간 실시하여 조성한 저곡설금(貯穀稧金)으로 1934년 3월부터 고령군 백여개 농촌진흥조합(農村振 興組合)에서 남녀공동 경작을 위하여 작답(作畓)을 매수하여 피폐(疲弊)해진 농 촌에 한 줄기 서광(曙光)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의 거유(巨儒) 면우(俛宇) 곽종 석(郭鍾錫),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각별하게 교유(交遊)하였다. 당대 영남 최고의 서예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가 188 1 년 공과 산방(山房)에 피서(避暑) 갔다가 읽은 주문공(朱熹·1130~1200)의 ‘초 은조(招隱操)’ 중 ‘반초은(反招隱)’의 내용을 쓴 글인 주문공반초은(朱文公反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