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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4 - 회(儒林社會)에서 융숭(隆崇)한 학덕(學德)과 탁월한 경륜(經綸)으로 각종 행사에 선도적(先導的)인 역할을 해 신망(信望)이 두터웠다. 1919년 파리세계평화회의 (巴里世界平和會議)에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세계만방 에 알리고자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한국유림송파리평화회서(韓國 儒林送巴里平和會書)’에 123번째로 서명해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한 민족의 역량(力量)을 하나로 모으는데 적극 동참했다. 간암(艮庵) 박돈(朴燉), 어산(於 山) 김희록(金熙祿),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병산(甁山) 김영학(金永學), 백 괴(百愧) 우하구(禹夏九), 이고(二顧) 최우동(崔羽東) 등 당대의 지사(志士) 명 류(名流)들과 우국(憂國)의 정(情)을 나누었다. 그후 일경(日警)에 검거돼 5,6개 월간 물을 씌우고 몽둥이로 실신(失身)케 한 후 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물고 문을 하는 등 온갖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심한 악형(惡刑)으로 얻은 불치(不 治)의 병으로 1927년 9월 20일 향년 63세에 서거(逝去)했다. 묘는 기족(旗族 ) 후산등(後山嶝) 계좌(癸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려 200 9 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했다. 2013년 12월 22일 ‘애국 지사(愛國志士) 만회(晩悔) 광산(光山) 이선생(李先生) 추모비(追慕碑) 건립추진 위원회(建立推進委員會)’에서는 공의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 아 추모비(追慕碑) 건립했다.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진성(眞城) 이완재(李完栽 ) 가 근찬(謹撰)하고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부림(缶林) 홍우흠(洪瑀欽)이 근서(謹 書)했다. 배위는 세동(世東)의 딸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참고문헌 :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국역유림단독립운동실기(國譯儒 林團獨立運動實記),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이봉조(李鳳朝)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내문(乃文)이고 호는 만하(晩霞)이며 통정대부(通 政大夫)를 증직(贈職)받은 인후(寅厚)와 증숙부인(贈淑夫人) 팔계정씨(八溪鄭氏 ) 사이에서 철종 12년(1861년) 9월 20일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 43년(190 6 년) 고령군 주사(판임관)에 서임(敍任)되었다가, 같은 해 고령군수(高靈郡守) 서 리(署理)로 승진하였다. 그후 일본의 횡포(橫暴)가 극에 달하자 순종 2년(190 8 년) 고령군수직을 사임하고 고령단연상채회(高靈斷煙償債會) 부회장(副會長)을 맡아 동년 음력 정월 24일에 보내온 대구단연회(大邱斷煙會)의 공함(公函)에 동년 음력 2월 2일에 동참한다는 취지의 답서(答書)를 보내는 등 고령지역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실질적(實質的)으로 주도(主導)하였고 1908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