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page

- 333 - 本部) 부회장(副會長), 성균관(成均館) 부관장(副館長) 등 유림단체의 주요 임 직을 두루 거치면서 사문진작(斯文振作)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성균관(成均館 ) 유도회(儒道會)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본부(本部) 회장(會長) 재임 시 대구향 교(大邱鄕校) 유림회관(儒林會館) 건립, 대구유도대학 활성화, 진사교육 정례화 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호주제(戶主制) 폐지를 포함한 가족법(家族法) 개정 반대, 8촌 이내 근친(近親)만을 금혼(禁婚)하는 동성동본금혼제(同姓同本禁婚 制)를 등 민법(民法) 일부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펼쳐 향내 수천 명의 유림(儒林)들을 동원하여 수차례에 걸쳐 궐기대회(蹶起大會)를 개최하고 가두행진(街頭行進)을 지휘했으며 자비(自費)로 전국 각계각층(各界各 層)의 저명(著名)한 유력인사(有力人士) 일천 여명을 상대로 호소문과 전단을 제작 배포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의회(議會) 부의장 (副議長)을 역임하고 '성서 조약국'으로 널리 알려진 '흥생한의원' 원장(院長) 인 혜산(慧山) 조경제(趙璟濟)선생과 더불어 초석회(礎石會)를 결성하여 거액의 기금을 조성하고 그 초대회장에 취임하여 불우이웃과 청소년 돕기, 장학사업, 경노 찬지를 베풀고 수림서당(壽林書堂)을 개설하여 서예, 한문, 예절교실을 운영한 등 지역사업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00년 10월 24일 향년 7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산7번지 선영 아래 계좌(癸坐)에 있 다. 배위는 노학(魯學)의 딸인 김해허씨(金海許氏)이다.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 파보(경인보), 동아일보(1986. 12. 2) ●이병회(李柄回)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응두(應斗)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다. 행은(杏隱 ) 호영(祜永)과 석유(錫裕)의 딸인 성주도씨(星州都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고종 2년(1865년) 7월 12일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高呑里) 본제(本第)에서 태어났 다. 젊었을 때에는 족조(族祖)인 소암(小菴) 이종희(李宗熙)에게 배우고 장성한 후에는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을 따라 학문은 정통을 계승하고 의리 를 실천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으며 선행(善行)은 흐르는 물과 같이하고 비리(非理)는 용서하지 않았다. 말세(末世)를 만나 고향에 은거(隱居)함에 부모 를 봉양(奉養)하고 조상의 제사를 모시며 치산(治山)에도 유의해 철따라 농사를 지으시고 검소절약(儉素節約)을 솔선해 이웃의 모범이 되었다. 장년기에는 유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