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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1 - 갔다. 일본인의 멸시, 냉대와 낯선 이국생활에 대한 부적응 등으로 나날이 고 달픔의 연속이었지만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부(富)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드 디어 탁월한 상술(商術)을 발휘하여 1955년 7월 북덕부동산주식회사(北德不動 産株式會社)를 설립후 대표 취재역(取縡役)에 취임하였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 민단(在日本大韓民國居留民團)의 상공인(商工人)을 돕는 등 왕성한 기업활동으 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在日本大韓民國居留民團)은 물론 교토 시내의 유 력한 사업가(事業家)로 부상하였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韓日國交正常化)로 인하여 1968년 모국방문(母國訪問)의 길이 열리게 되자 여생을 종중(宗中)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재산(財産)을 환원(還元)하기로 다짐하였다. 먼저 중시 조 규보(奎報)와 안동장군(安東將軍) 미숭(美崇) 묘역을 정비하고 위토답(位土 畓) 수천평을 마련하였다. 1971년 경북실내체육관 건립기금 모금 시 30만 엔 을 쾌척(快擲)하였고 대구달성공원에 물사자 및 물개 6마리를 기증했으며 1972년 경북 동해안지구 경비초소에 서치라이트 12기를 기증했으며 1973년 경북노인회관 건립기금으로 50만 엔을 헌금하였고 치안국 수사용 오토바이 50cc 50대를 기증하고 대구 시내 가로수를 200본 헌수(獻樹)했다. 고향을 위 해서는 1971년 고령초등학교에 녹음기 및 피아노 등 교육기자재(敎育機資材 ) 수십 점을 기증하고 1973년 고령군청 등 기관에 관상수 200본을 헌수(獻樹)하 였고 고령경찰서 수사용 오토바이 50cc 2대와 의용소방대 장비일체를 기증하 였다. 김수학(金秀學) 도지사(道知事)를 비롯하여 역대 경북도지사가 재일교포 모금차 일본을 방문할 때 체류기간 중 공의 자택에 머무는 동안 숙식제공은 물론 거액(巨額)의 헌성금(獻誠金)을 쾌척(快擲)하였다. 1985년 투철한 애국심 (愛國心)으로 국가와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으로부 터 국민훈장(國民勳章) 목련장(木蓮章)을 수여받았다. 2002년 10월 10일(음력 ) 향년 89세로 일본땅에서 지병(持病)으로 졸(卒)했으나 시신(屍身)을 고국으로 운구(運柩)하여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산 31번지 소재 읍내파 대종중 선영(先 塋) 아래쪽 좌편 양지바른 곳에 편히 모셨다. 종중에서는 1978년 위선사(爲先 事)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를 오래토록 기리기 위하여 여주이공대호효행비 (驪州李公大浩孝行碑)를 세웠다. 배위는 명선(明善)의 딸인 청주한씨(淸州韓氏 ) 이다. 참고문헌 : 여주이씨족보(驪州李氏世譜), 공적조서(功績調書), 여주이공대호효행비(驪州李公大浩孝行碑) ●이맹기(李孟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