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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경주김씨 수은공파내 참봉공 파보(정유보) ●김수옹(金守雍)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경화(景和)이고 호는 기재(棄齋)이다. 성균생원(成 均生員)을 지낸 공(珙)과 진사(進士) 휜鄭楦)의 딸인 진양정씨(晋陽鄭氏) 사이 에서 장남으로 중종 8년(1513년) 3월 17일 고령군 대가야읍 월기촌(月器村)에 서 태어났다. 한번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께서 지나다 들러 기이하게 여 겨 생원공(生員公)이 이 아이는 반드시 넓은 기량(器量)을 가진 인재(人才)가 될 것이라고 일컬었다. 중종 31년(1536년) 아버지를 뵈러 한양에 갔는데 마 침 별시과거(別試科擧)가 있어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를 보아 문과(文科)에 급 제하였다. 그때 나이가 24살이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시골과 서울에 알려졌다. 뒤이어 동생 둔와(遯窩) 내옹(乃雍)도 31세 되던 해 중종(中宗) 38년(1543년) 계묘(癸卯)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후 연서찰방(延 曙察訪), 평안도 평사(評事), 예안현감(禮安縣監), 경상도 도사(都事)를 거쳐 이 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다. 그가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 풀었던 사실이 중종실록(中宗實錄) 97권, 98권에 기록된 바 이를 약술(略述)하 여 소개하고자 한다. 중종 35년(1540년) 경자년 9월 예안현감으로 부임한 그 는 중종 37년(1542년) 1월 12일 지경(地境)이 궁벽(窮僻)하고 호수(戶數)가 274호에 지나지 않는데 예안현(禮安縣)이 타 지역 대비 부당한 신역(身役)과 조세(租稅) 등의 부과로 피폐(疲弊)해진 사정을 아뢰고, 지경(地境)이 궁벽하고 백성이 적은 폐단, 수군(水軍)을 대신 정(定)하는 폐단, 전곡(錢豰)을 헛되이 소 모하는 폐단, 수량 이외의 양두(羊頭)로 인한 폐단, 기인(其人)을 준례(準例)에 따라 배정하는 폐해 등 그 적폐(積弊)의 시정(是正)을 요구하는 5조목(條目)의 상소문(上疏文)를 올려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상주(上奏)하여 경장 (更張)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다스리니 관인과 백성 들이 그를 추종(追從)하였다. 1543년 계묘년 5월에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영 전(榮轉)되어 체직(遞職)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 소윤(小尹)이 형조판서 윤임(尹任)과 이조판서(柳仁淑) 등 대윤 (大尹)을 죽이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등 명사(名士)를 내쫓았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때부터 더 이상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을 마음이 없어 갓끈을 만지며 명종 1년(1545년) 가을 벼슬에서 물러나 합천의 숭산(崇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