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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9 - 교(儆新學校)에 유학(遊學)시켜 인재로 양성시켰다.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 선생에게 수학(受學)한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동문간(同門間) 우의 (友誼)를 돈독하게 하고자 스승이 사셨던 재(齋)의 이름을 따서 ‘하산정계(霞山 亭契)’를 결성하였는데 대표하여 서문(序文)을 작성하였다. 31세 때인 1925년 동서의학(東西醫學)의 회통(會通)을 꾀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의학자(韓醫學 者)인 석천(石泉) 남채우(南采祐) 선생님에게 수학(修學)하였으며 제자들의 모 임인 청낭계(靑囊契)의 창설(創設)을 주관(主管)하고 서문(序文)을 작성하였다 . 32세 때 구목재(九睦齋)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36세 때 율산잡고 (栗山雜稿)를 짓고 유산(有山) 서성원(徐聖源)선생과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 선생의 유고(遺稿)를 정리하였다. 1944년부터 1954년까지 고령향교(高靈鄕校 ) 장의(掌議)를 세 번 연임(連任)하고 55세가 되는 생시(生時)인 1955년 3월 2 7 일 후학(後學) 제자들이 스승을 높이고 벗을 가까이 하는 도리인 융사친우지도 (隆師親友之道)를 힘쓰기 위하여 스승의 호(號)를 따서 율산정계(栗山亭稧)를 결성하였는데 계원(禊員)이 249명이나 되었으며 매년 소만일(小滿日) 앞 일요 일에 명곡정(明谷亭)에서 연례행사(年例行事)로 향사(享祀)를 지낸다. 57세 때 고령유도회(高靈儒道會) 부회장(副會長)에 임명되었으며 60세 때 만구(晩求) 이 종기(李種杞) 선생을 모시는 서락서당(西洛書堂) 장의(掌議)와 선고(先考)의 스 승인 농산(聾山) 이경벽(李慶壁)을 기리는 제자들의 모임인 농헌정계(聾軒亭契 ) 의 계장(契長)을 맡았다. 62세 때인 1956년 안동장군(安東將軍) 휘(諱) 미숭(美 崇) 선조(先祖)의 숭고(崇高)한 지절(志節)이 숨쉬고 있는 미숭산성(美崇山城)이 국유지(國有地)로 소유(所有)되어 있음을 통탄(痛歎)하여 종중 소유로 환원하여 줄 것을 청원하는 소원장(訴冤狀)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과 각부(各 部) 장관(長官)에게 발송(發送)하였으나 성사(成事)치 못하였다. 1959년 고령군 지(高靈郡誌)를 편찬할 때 장물(掌物 : 재무)을 맡아 고령군지(高靈郡誌)가 성 공적으로 발간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68년 11월 28일 향년 74세로 졸(卒 ) 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화갑 안산(案山) 장등(長嶝) 곤좌(坤坐 ) 에 있다. 묘갈명은 진와(進窩) 이헌주(李憲柱)가 지었다. 만사(輓詞) 32수와 율 산잡고(栗山雜稿) 13책이 전한다. 제자들이 1990년 7월 21일에 공의 유고(遺 稿)를 모아 율산집(栗山集)을 간행하였다. 공은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의 고 족제자(高足弟子)로 중년(中年)에서부터 구목재(九睦齋)에 기거하면서 후학양성 에 힘써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만년까지 포의한사(布衣寒士)로 청빈(淸 貧)하고 선비로서 올곧은 삶을 살다 간 분이다. 초취(初娶)는 도희(道熙)의 딸 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재취(再娶)는 용환(容煥)의 딸인 연안전씨(延安田 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