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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5 - 愛運動本部)가 수여하는 세계평화공로상(世界平和功勞償)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 하였다. 그밖에 성균관(成均館) 전학(典學)과 유도회(儒道會) 경북지부(慶北支部 ) 사무국장(事務局長)을 맡아 인륜(人倫)의 얼을 바로 세우는 부식강상(扶植綱 常)에도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고 16년간 대한민국재향군인회(大韓民國在鄕軍人 會) 고령연합분회장(高靈聯合分會長)을 맡아 지역사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 다가 2000년 11월 17일 향년 79세로 졸(卒)하였다. 공은 이산(離散)의 아픔을 인술(仁術)과 사회봉사(社會奉仕)로 승화(昇華)시킨 진정한 ‘고령의 슈바이처 ’ 로 추앙 받았던 거목(巨木)이다. 참고문헌 : 최고.최초를 찾아라 고령기네스 (고령군/고령문화원. 2016.5월) 강릉유씨 대동보(갑술보) ●윤병태(尹炳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상업을 하였던 아버지 달식(達植)의 장남으로 1936년 8월 5일 다산면 곽촌리 947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소를 먹이면서 낙동강 연변(沿邊) 백사장(白沙場)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씨름을 익혔고 다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거쳐 1951년 계성고등학교(啓聖高等學校 ) 에 진학하자 1950년대 당시 전국 씨름판을 석권(席卷)하면서 5백 마리 이상 황 소를 상(償)으로 받았다는 소문이 있는 경북대 체육과 출신의 인텔리 장사 김상 영(金相瑛) 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김위생(金渭生), 전철수(全轍洙 : 전 민속씨름협회 부회장) 등과 함께 출전하여 1953년, 1954년 계성고가 전국체육 대회 2연패를 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키 169cm, 몸무게 60kg의 체 격으로 씨름선수로서는 작은 체구이었지만 혁신적인 기술로 관중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주특기는 왼배지기 기술인데, 누구든 걸렸다 하면 당해 내지 못 하고 모래판에 쓰러졌다. 그 후 현재의 영남대에 입학하여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최초 전공은 건축학이었다. 1958년 대한씨름협회와 한국일보사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전국장사씨름대회 경량급 결승에서 칠곡 출신의 김진탁을 꺾고 우 승하였으며, 대구에서 열린 씨름협회 주최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도 정상을 차지하였다. 1968년 김천 금성중학교에서 고령중학교에 체육교사로 전근 와 3 년 동안 재직하는 동안 씨름부를 창설하여 최성봉, 이형석 선수 등을 출전시켜 도민체전에서 우승을 하였고 1971년 대구 영신고등학교 체육교사 겸 씨름 감 독으로 부임하여 1963년 창설한 영신고 씨름부가 1965년 전국체전 고등부에 처 녀 출전하여 우승한 이래 1973년까지 9연패(連覇)의 위업(偉業)을 달성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