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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 -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영암(靈庵)이다. 전교(典校)를 지낸 죽림공(竹林公 ) 이선(利善)과 청주한씨(淸州韓氏) 흥복(興福)의 딸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자 (次子)로 1922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묵시리(墨時里)에서 태어 났다. 영변보통학교와 영변농업학교를 거쳐 평양의학전문학교(平壤醫學專門學 校)를 졸업한 후 23세에 의사국가고시(醫師國家考試)에 합격하여 도립(道立 ) 신의주병원(新義州病院), 도립(道立) 강계병원(江界病院) 외과과장(外科科長)을 역임하다가 1951년 일사후퇴(一四後退) 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왔다. 1952년 군에 입대하여 육군군의학교(陸軍軍醫學校)를 졸업 하고 현역군의관(現役軍醫官)으로 복무한 후 영천군 북부보건진료소장(北部保 健診療所長)을 역임하고 1957년 2월에 고령군 중부보건진료소장(中部保健診 療所長), 1964년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초대 고령군 보건소장(保健所長)으로 근 무하다가 영생의원(靈生醫院)을 개원(開院)하였다. 1969년 3월에 가톨릭의과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博士學位)를 취득하였다. 종합병원(綜合病院)이 없는 의료취 약지역(醫療脆弱地域)인 고령지역에 1988년 9월 6일 영생종합병원(靈生綜合病 院)을 개원하여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였다. 특히 영생병원을 운영하는 영 암의료재단(靈庵醫療財團)에는 요양병원(療養病院)과 요양원(療養院)이 있어 시너지 (synergy : 상승) 효과를 내고 있다. 보건복지결합체(保健福祉結合體)의 이상적 인 모습으로 꼽힌다. 뇌성마비·지적장애·소아마비 등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안 식처인 국제재활원(國際再活院)에 재활자금(再活資金)으로 매월 40만 원을 기 부하고 수시로 방문해 재활의 꿈을 키우는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 1974년에 창설된 고령문화원(高靈文化院)의 초대 원장(院長)으로 취임하여 20여 년간 재직하면서 국악당(國樂堂)을 유치하고 충혼탑(忠魂塔) 건립에 일익(一翼)을 담당하였고 대가야유물전시관(大伽倻遺物展示館) 건립에 초석(礎石)이 되었으며 애국지사(愛國志士) 현창(顯彰) 추진위원장(推進委員長)을 맡아 해영(海影) 신철 휴(申喆休), 수석(瘦石) 남형우(南亨祐), 영주(令州) 김상덕(金尙德), 백농(栢儂) 김 재열(金在烈), 장로(長老) 최영돈(崔永敦) 등 제현(諸賢)의 사적비(事蹟碑)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79년에는 고령·거창·합천 등 대가야 문화를 꽃피운 지역의 인사 400여 명이 발기해 설립한 ‘대가야문화권개발추진위원회’(大伽倻 文化圈開發推進委員會)'의 위원장을 맡아 지역문화 발전에도 힘을 보탰다. 198 5 년 국내외 의료 취약 지역에서 헌신적 인술로 참다운 사랑을 베풀고 있는 의료인과 의료단체를 발굴하고 그 숨은 뜻을 기리기 위한 보령의료봉사상 (保寧醫療奉仕償) 제1회 수상자(受賞者)로 선정되었으며, 1985년 11월 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청년대회에서 미국의 세계평화박애운동본부(世界平和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