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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 - 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세상일에 나아가려는 뜻을 끊어 버리고 이름 있는 산 수(山水)를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1945년 광복(光復) 후 부산에서 대동문 교회(大東文敎會)를 결성하여 시를 서로 주고받았으며(唱酬) 후진을 양성하였 다.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을 앞장서서 부르짖고 유풍(儒風) 진작 (振作)에 힘쓰니 모두 흠앙(欽仰)하였다. 당대의 지역 명사와 교유하였고 고령 향교에서 학식이 뛰어나고 유림(儒林)의 모범이 되어 처사(處士)로 일컬었다 . 성격(性格)과 도량(度量)이 넓고 굳세었다. 또한 기개가 크고 넓었으며 문학(文 學)이 일찍 성취되어 필화(筆畵)가 역시 정묘(精妙)하였으며 뜻이 고상하고 행 실은 단정하여 향리 사람들이 경모하였다. 1965년 8월 12일 향년 72세로 졸 (卒)했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구라곡(九羅谷) 우편 갑좌(甲坐)에 있다 . 묘갈명은 성산인(星山人) 이헌주(李憲柱)가 지었다. 유고(遺稿) 2권이 전한다 . 배위는 준모(準模)의 딸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참고문헌 : 고창오씨 세보(신사보), 고령군지(1959년) ●오태현(吳泰鉉)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성훈(聖訓)이고 호는 송담(松曇)이다. 유학(幼學 ) 재경(載慶)과 준희(俊熙)의 딸인 연안차씨(延安車氏) 사이에서 1929년 1월 1 8 일에 태어났다. 육군 준장(准將)으로 예편하였으며 화랑무공훈장(花郞武功勳章 ) 을 수훈(受勳)받았다. 교육학 및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해외 한국학 및 전통문화연구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월드컵조직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 2013년 9월 8일 향년 75세로 졸(卒)하였다. 배위는 복수(福守)의 딸인 경주최 씨(慶州崔氏)이다. 참고문헌 : 고창오씨 세보(신사보), 동아일보(2013년 9월 9일) ●유병훈(兪炳壎)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고령군교육감을 지낸 민식(敏植)과 장하(璋夏)의 딸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1930년 12월 13일에 태어났다. 대구대학(大邱大 學 : 현재 영남대학교)을 졸업한 후 육군 장교로 임관되어 육군소장으로 진급 하였다. 예편한 후 군장회사(軍裝會社) 회장을 지냈다. 몰년(沒年)은 미상(未詳 ) 이다. 배위는 재순(在淳)의 딸인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