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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9 - 찰서(密陽警察署) 폭파거사(爆破擧事)’이었다. 1920년 초 그는 곽재기(郭在驥 ) 등과 만주로부터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입국, 먼저 밀양경찰서 폭파거사에 참 여하여 활동하던 중 1920년 6월 구영필(具寧必)의 밀고로 사전에 피체(被逮)되 어 1921년 6월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고 출옥(出獄)하였다. 이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岩)의 세칭 '경북의열단사건' 및 1928년 '청주일 심단(淸州一心團)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후 1927년 1 0 월 29일 조직되었던 청년 운동 단체인 고령청년동맹(高靈靑年同盟) 집행위원 장(執行委員長)을 지냈고 1928년 10월 신간회(新幹會) 고령지부장(高靈支部長 ) 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8월 16일 고령군에서 조직된 치안 유지 단체인 고령 치안유지대(高靈治安維持隊) 대장(隊長)을 지내는 등 지역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1월 23일 향년 83세로 졸(卒)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建國褒章), 1990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국 장(愛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1983년에는 고령향교 뒤편 연조공원 어귀에 그의 공적을 기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고령군지(1996년) ●오기문(吳基文) 본관이 고창(高敞)이다. 아버지 매서(梅西) 술상(述相)과 인원(麟源)의 딸 군 위방씨(軍威方 오례(吾禮) 사이에서 장녀로 1911년 5월 3일 고령군 쌍림면 매 촌1길 157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생 성산인(星山人) 배강이(裵康伊)와 결혼하 여 18세 때 도일(度日)하였다. 요코하마(橫濱)공립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졸업 한 후 민족운동으로 해외민족구호사업(海外民族救護事業)을 전개하였다. 광복(光 復) 후 재일본(在日本) 조선연맹총본부(朝鮮聯盟總本部) 부녀부장(婦女部長)에 취 임하였으며 건설동맹준비(建設同盟準備) 재정위원(財政委員)을 맡아 200만 엔을 쾌척(快擲)하여 거류민단(居留民團) 결성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중앙총본부(中 央總本部) 무임소부장(無任所部長)과 동경(東京) 한국모자학원(韓國母子學園) 이 사장(理事長)을 지냈다. 1945년 8월에 재일본(在日本)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 초 대회장(初代會長)에 선출되었으며 1946년에 중앙총본부(中央總本部會)를 결성하 여 18년간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최전방 부대인 금화고지를 직접 방문하여 군인들을 위로하였고 위문품(慰問品) 보내기와 난민구제운동(難 民救濟運動)에도 앞장섰다. 88서울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 때 각 1억 원씩 체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