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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 ●변희용(卞熙瑢)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광숙(光淑)이고 호는 일파(一波)이다. 아버지 창 기(昌褀)와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에 4남 중 3남으로 1894년 5월 10일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 284번지에서 태어났다. 1902년부터 1908년까지 해인사학 림(海印寺學林)에서 수학(修學)하고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이 열었던 내산서 당(乃山書堂)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정칙영어학교(正 則英語學校)를 거쳐 일본의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여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킨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하였다 . 1919년 2․8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한때 니시깐다(西神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 3 월 오사까(大阪)에서의 독립선언 준비를 도와주었고 4월 일본인 사상단체 여명회 (黎明會)에 가입했다. 10월 기독교청년회(YMCA) 임시총회에서 평의원에 선임되 었다. 11월 일본에 온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원 여운형(呂運亨) 환영회 에 참가했다. 1920년 7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하기 순회강연대의 연사로서 귀국 하여 ‘노동문제의 문화사적 배경’ 등을 강연했다. 1924년 3월 귀국하여 시대일 보 학예부장, ≪조선지광≫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 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김약수(金若洙)·김 종범(金鍾範) 등과 북풍파(北風派)를 대표하고 통일적 조선공산당 창립을 위한 국내 조직국 ‘13인회’에 참석하였다. 1924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태화관(泰 和館)에서 제2·4·5·6·7대 국회의원을 지낸 평생의 반려자 박순천(朴順天)과 결혼 했다. 1925년 10월 북 성회(北星會)가 발전적으로 해체된 뒤 결성한 일월회(一月 會)의 기관지 《사상운동》을 이여성과 함께 발간하였으며, 1926년 고국으로 영구 귀국한 후 박순천(朴順天) 여사와 함께 1년간 고령군 쌍림면 안림의 고모댁에서 살다가 대가야읍 지산리 73번지 모산골로 이사를 하였다. 1927년 8월 25일 신간 회(新幹會) 고령지회(高靈支會) 창립대회에서 회장이 되어 악덕(惡德) 지주(地主 ) 에 대한 부당한 소작료(小作料)를 반대하는 농민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농사에 종사하면서 고령읍교회에 최초의 고령유아원(高靈幼兒園)을 설립하여 운 영하였다. 1929년 신간회 고령지회 회계 및 재무부장을 역임하고 1930년 신간 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후보로 선정되었다. 1938년 서울로 이사 한 후 8․15까지 각지를 전전(轉轉)하였다. 1945년 우익신문(右翼新聞)인 대공일 보사(大公日報社)와 잡지 ≪재건≫의 주간(主幹)을 맡았다. 한국민주당에 입당 하였고, 조선의 광복을 위한 애국금(愛國金)을 모으기 위해 결성된 애국금헌성회(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