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page

- 313 -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원경(元卿)이고 호는 소여(少旅)이다. 생원시(生員試) 에 입격(入格)한 후 향리 유림의 추앙을 받는 지사(志士)인 기렬(璣烈)과 명섭 (明燮)의 딸인 안동 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1884년 7월 12 일에 고령군 우곡면 야정리 930번지에서 태어 났다. 선조의 묘역을 단장하기 위해 모인 문중사람 들 및 우곡면 도진리에 사는 박영화 (朴英華)·박차천 (朴且千) 등과 비밀리에 논 의한 끝에 마을 사람 30여 명을 규합하고 1919 년 4월 6일 밤 11 시경에 만세 를 외치며 마을을 한 바퀴 돈 뒤 우곡면사무소까지 행진해 갔다. 이때 참가한 사 람들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공이 나누어 준 태극기를 흔들며 밤늦도록 시위를 계속하다가 면장의 만류로 일단 해산 하였다. 이튿날 공은 고령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 되었다. 1957년 6월 2일 향년 74세 로 졸(卒)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建 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박채환(朴採煥)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경삼(敬三)이다. 아버지 내순(來淳)과 지묵(志黙)의 딸인 합천이씨(陜川李氏) 사이에서 1882년 3월 12일에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32번지에서 태어났 다. 도진리(桃津里)에서는 4월 6일 박재필(朴在弼)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있은 후 4월 8일에도 의거가 있었다. 1919년 4월 8일 같은 동리에 사는 박기태(朴基太)집의 혼례에 참석하였다가 돌아오던 중 우곡면사무 소 앞에서 고령경찰서 왜경 4명이 와서 주민을 모아놓고 독립운동을 하지말도 록 경고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 그는 경고를 듣고 난 후 귀가 하려는 수십 명의 주민에게 독립만세시위를 종용한 후 스스로 '대한독립만 세'를 선창 하자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후 이해 4월 30 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5월 20일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2년 3월 12일에 졸(卒)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建 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