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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2 - 원회, 1971년), 진중일지(陣中日誌 : 토지주택박물관, 2010년) ●박재근(朴在根)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진근(瑨根)으로 개명(改名)하였고 자는 영언(韺彦), 호 는 운석당(雲石堂)이다. 유학(幼學) 종항(宗恒)과 석관(錫寬)의 딸인 창녕조씨 (昌寧曺氏) 사이에서 고종 7년(1870년) 1월 6일 태어났다. 일찍이 만구(晩求 ) 이종기(李種杞) 문하에서 수업한 후 온능참봉(溫陵參奉)에 제수되어 경기도 양 주시 장흥면 일영리 21번지 소재 조선 제11대 중종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신 씨(愼氏)의 능(陵)을 관리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이하자 우남 (雩南) 이승만(李承晩) 등과 대한독립(大韓獨立)을 모의(謀議)하였으며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 대 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당시 유림에서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서의 민 족대표 33인 가운데 유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것을 통분하고 한국의 독립을 간 절히 원하고 있다는 요지의 장서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 이에 1919년 경남 거창(居昌)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星州)의 장석 영(張錫英), 충남 홍성(洪城)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해(上海)로 갔다. 이때 박재근은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서 명하였다. 그후 달성군 현풍면에서 영업중이던 약국의 문을 닫고 조랑말을 타 고 고령, 성주, 서울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였다. 1955년 5월 26일 향년 8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촌 뒤편 선고(先考) 좌편(左便)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행로난 (行路亂) 등 한시집(漢詩集), 각종 의서(醫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문, 대구 한시(漢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壯元)한 한시 등 2 0 여점이 유고(遺稿)로 전한다. 초취(初娶)는 헌규(憲珪)의 딸인 이천서씨(利川徐 氏)이고 재취(再娶)는 재운(在運)의 딸인 진주하씨(晋州河氏)이다. 참고문헌 : 국역유림단독립운동실기(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 독립유공자 공 훈록(국가보훈처), 밀성박씨 충간공파 세보(을해보) ●박재필(朴在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