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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1 - 오보) ●박은용(朴恩用)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문수(文叟)이고 호는 우정(于亭)이다. 정와(靜窩 ) 기훈(基熏)과 석정(錫鼎)의 딸인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1927년 태어났 다. 문학박사(文學博士)로서 효성여자대학교 교수, 동대학원 원장(院長), 일본 동경대학교 객원교수(客員敎授), 전통문화연구소 소장(所長), 한국어문학회 회 장(會長)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국민훈장(國民勳章) 동백장(冬栢章)과 경상북 도 문화상 학술부분을 수상하였다. 국어학자로서 만주어문어연구(滿洲語文語 ) Ⅰ, Ⅱ집과 만주어사전(滿洲語辭典)을 집필하였으며 국어학(國語學) 관련 저서 십여종이 있다. 2006년 3월 11일 향년 80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우 곡면 문연서원 뒤편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기영(基永)의 딸인 성산이씨(星 山李氏)이다. 참고문헌 :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도원록(桃園錄) ●박인시(朴仁是) 본관(本貫) 및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다.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 터 경북 고령과 경남 거창일대에서 의병 15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경북지역에서는 일월산(日月山)과 소백산(小白 山)을 중심으로 허위(許蔿)ㆍ이강년(李康秊)ㆍ신돌석(申乭石)ㆍ변학기(邊鶴基) 등 이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수시로 군대와 헌병대 를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북 의병은 소규모로 분진(分 陣)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활동하였다. 박인시(朴仁是) 의병진(義兵陣)은 고령의 서북쪽 시무동(是無洞)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탐지되었다. 1908년 8월 25일 일제는 야로분견대(冶爐分遣隊)를 출동시켜 이튿날 새벽 서북방 약 35리 지점에서 위치한 명곡(明谷) 근처에서 휘하(麾下) 의병(義兵) 20명 중 15명이 전사하였다. 이날 박인시(朴仁是) 의병장(義兵將)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정부 는 순국 106년 만에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국장 (愛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