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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 - 준·나동규·김성호 등과 함께 인면공작대 대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12월 전방 지구인 인도의 임팔(Imphal)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제15 군단 사 령부에 도착한 광복군 인면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다.1944년 1월 7 일 문응국·김상준·나동규는 ‘부야크’에서 영국군 제201부대와 함께 임팔 전선으로 출발하였고, 박영진은 제204부대에 배속된 김성호와 ‘아라컨’을 거쳐 3월 7일 임팔 전선으로 이동하였으며 대장 한지성도 도착하였다. 이후 이들은 임팔을 중 심으로 전개되던 영국군의 대일 작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임팔 작전 에서 승리한 인면공작대는 철수한 뒤, 1945년 연합군이 버마 지구의 일본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자 3개 반으로 나뉘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박영진은 버마 중북부 지역으로 배치되어 버마 수도 랭군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 작전 에 참전하여 전과를 올리면서 7월 초까지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하였다. 195 0 년 6월 25일 향년 30세로 졸(卒)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국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8),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박영화(朴英華)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응춘(應春)이다. 아버지 덕원(德源)의 3남으로 1880년 1월 13일 고령군 우곡면(牛谷面) 도진동 134번지에서 태어났다. 공은 야정동(野亭洞)의 박재필(朴在弼)과 더불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운동 에 대응하여 고령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박차천(朴 且千)을 시켜 동네를 돌며 동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곧바로 강변에 모였다. 1919년 4월 6일 밤 11시경 주민 30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이어 마을을 돌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을을 일주 한 시위대는 우곡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의 의지를 전달하였다. 밤 12시 를 넘겨 시위가 계속되자 면장이 나와 이들의 해산을 간청하였고 시위대는 해 산하고 말았으나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1952년 3월 2일 향년 73세로 졸(卒)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 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1986년),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