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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8 - 文培), 이하영(李河永) 씨 등이 그 당시 고령유치원 출신이었다. 점차 더해가는 일경의 탄압을 피하고 장남의 취학(就學)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피하기 위해 서 1939년 서울에 올라왔지만 현실적인 생활고(生活苦)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 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감(女工監)으로 근로현장에 있기도 하였다 . 1937년에는 황신덕(黃信德)과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을 세워 부교장(副 敎長)으로 일했는데, 이 학교가 오늘날의 중앙여자중고등학교(中央女子高等學 校)로 발전하였다. 8·15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建國婦女同盟)을 조직, 모스 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불복하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1947년부터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獨立促成愛國婦人會)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학교법 인 추계학원(秋溪學園)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부인신문(婦人新聞)》을 창간 , 사장으로 5년 동안 활약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는 감찰위원이 되고, 1949년 국 민회(國民會) 중앙총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大韓女子靑年團) 단장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대한부인회총본부(大韓婦人會總本部) 회장에 부임하여 6년간 을 재직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 소속으로 서울 종로 갑구 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제2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자유당 정권과 투쟁하면서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 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하였다. 한편 1958년 제4대, 1960년 제 5 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으로 거듭 당선되어 여권신장(女權伸張)과 민권수 호(民權守護)에 앞장섰으며, 제3공화국 때는 민주당 총재를 역임하였다. 196 5 년에는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당수(黨首)가 되었으나, 한일회담 비준 반대 를 위한 의원직총사퇴의 극한투쟁결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尹潽善)이 탈당 하자, 제5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유진오(兪鎭午)에게 당수직을 물려주었다 . 1967년 다시 통합야당이 된 신민당(新民黨)의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 5선 의 원을 기록하였다. 고령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1972년 경기도 안양근명여자상업 학교(槿明女子商業學校) 이사장으로 여성교육에 여생을 바치면서, 국토통일 원 고문, 육영수 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 1983년 1월 9일 졸(卒)하였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리 4․19 국립묘지이 다. 참고문헌 : 최고.최초를 찾아라 고령기네스 (고령군/고령문화원. 2016년 5월) 고령대관(1959년) ●박암(朴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