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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7 - 章)과 대한민국 을지무공훈장(乙支武功勳章)을 받았다. 1958년 1월 6일에 향 년 3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원주시 태장동 공동산 건좌(乾坐)에 있다. 배위 는 택근(澤根)의 딸인 하동정씨(河東鄭氏)이다. 참고문헌 :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도원록(桃園錄) ●박순천(朴順天)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본명은 박명련(朴命蓮)인데 박순천(朴順天)이란 이름은 독립운동 때 딴 별명이다. 1898년 9월 10일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한학자인 아버지 재형(在衡)과 어머니 김춘열(金春烈)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10세 에 기독교에 입교(入敎)하였다. 1917년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졸업, 마산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과 연결되어 마산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1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도피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때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을 사용, 그 뒤 ‘박순천’으로 세인의 입에 굳어졌다. 그 해 가을 기녀(妓女)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동경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吉岡女子醫學專門學 校)에 들어갔으나 몇 달을 못 다니고 3·1운동 때의 보안법 위반혐의로 다시 붙잡 혀 국내로 압송되어 마산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일 본에 유학, 1926년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1924년 1 2 월 24일 서울 무교동 태화관에서 수감 당시 자신을 자주 면회 와서 알게 된 동경유학생이던 변희용(卞熙瑢)과 결혼하여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 있는 시고 모를 모시면서 대가야읍 지산리 모산골에서 생활하였는데 일본에서 연락선을 타고 왔다고 해서 “연락댁이”라 불리어졌다. 그 당시 살았던 집은 동네 중간 의 산비탈에 참대 밭이 우거진 곳이었으며 본적지도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 산리 73번지로 옮겼다. 13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농번기에는 탁아소를, 농한기에는 야학을 열어 아이들과 부인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고 ‘쌀계’를 조직하여 절미운동을 일으키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33년 6월 17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지산동의 경주 김씨 재실 인 향림정(香林亭)과 진양 정씨 재실인 황산재(黃山齋)에서 농민 90여 명에게 야학(夜學)을 실시하였으나 경찰에서 허가받지 않은 야학은 금지한다”고 하여 야학을 그만둔 사실이 보도되어 식민지하(植民地下)에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실 감하면서 통탄하였다. 그리고 변희용(卞熙瑢)이 1926년 고령읍교회에 설립한 고령유치원에 교사가 되어 성경, 유희, 어린이 노래 등을 가르쳤으니 김문배(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