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page

- 304 - 년 61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남산에 있다. 지역사회 발 전과 육영사업에 끼친 공적으로 인하여 표창장과 감사장이 수상이 42회에 달하니 공(公)이 고령지역 사회에 공헌(貢獻)한 바가 얼마나 지대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 이 있다. 초취(初娶)는 승환(昇煥)의 딸인 성산도씨(星山都氏) 완수(完洙)이고 재취 (再娶)는 우식(佑植)의 딸 기계유씨(杞溪俞氏)이다. 참고문헌 : 남평문씨 대동보, 고령군 체육사 ●문상직(文相直)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맹회(孟晦)이고 호는 일성(一星)이다. 아버지 진 호(鎭昊)와 인식(仁植)의 딸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1893년 3월 23일 에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265번지에서 태어났다. 상경하여 경신중학교(儆 新中學校)에 입학에서 약 1년간 학문에 전념하다가 곧 만주로 건너가서 통화 현(通化縣)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에는 중국 난징(南 京)과 만주 안동(安東)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만주 안동에 서 고령 출신인 박광(朴洸)이 운영하는 곡물 무역상 신동상회(信東商會)에서 근무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신원인 황대벽(黃大闢)으로부터 국내에 발표 할 선포문(宣布文)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綱領) 등 각종 인쇄물 50여 장을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919년 4월 13일, 이들 서류를 과자 상자 속에 숨 겨 신의주를 거쳐 서울에 들어와 김상용(金尙容)에게 선포문과 대한민국 임시정 부 강령 40장을 넘기고, 이튿날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외 교부장인 서상일(徐相日)에게 나머지 10장을 전달하고 반포하도록 하였다. 같 은 해 7월에는 황대벽에게서 고유문(告諭文), 『독립신문(獨立新聞)』,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원개조서(閣員改造書) 등 300여 장을 받아 송재기(宋載基)에게 주 어 전국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1919년 8월, 신흥무관학교 군사과 졸업생의 모 임인 학우단(學友團)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김노원(金魯元)·김용만(金用萬)·이순원 (李淳元) 등과 함께 국내 관공서와 한인 관리, 일본인 고위 관리에 대한 폭탄 테 러를 논의하였으며 9월 11일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와 대구에서 서영균(徐榮均), 송정득(宋貞得), 김근(金根), 홍간제(洪干濟) 등을 포섭하여 거사에 참여하도록 하 였다. 1920년 1월 26일 거사를 위해 폭탄을 들여오도록 홍간제(洪干濟)를 만주에 보내고 자신도 만주로 가려던 중 경상북도 경찰부에 검거되어 같은 해 7월 대구지 방법원에서 「대정8년제령(大正8年制令)」 제7호와 「총포화약류취제시행규칙」 위반, 경상북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 개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4년 14일 만에 감형(減刑)되어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