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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 -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30년 밀고(密告)로 공산주의자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31년 불복수토병(不伏水土病)으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요양하였다. 1943년 3월 13일 향년 69세에 일제의 감시와 위협, 창씨개 명(創氏改名) 및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强要) 등을 참을 수 없어 자결(自決 )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으며 1984년 고령군 대가야읍의 가야공원(伽倻公園)에 순국기념비(殉國 記念碑)가 세워졌다. 배위는 성우(成雨)의 딸인 평산유씨(平山庾氏) 아지(阿只 ) 이다. 참고문헌 : 최고.최초를 찾아라 고령기네스 (고령군/고령문화원. 2016.5월) 의령남씨 족보(병술보) ●문명구(文明龜) 관향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희수(熙洙)이고 호는 삼고(三顧)이다. 아버지 덕채(德采)와 민식(敏植)의 딸인 기계유씨(杞溪俞氏) 사이에서 1926년 11월 2 6 일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462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백괴 공(百愧公)으로부터 경전(經傳)을 수학修學)하였으며 신학문(新學問)을 탐구하 기 위하여 현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의 전신(前身)인 청구대학(靑丘大學)에서 수 학하다 친병간호(親病看護)를 위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선친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가전(家傳)인 의약업(醫藥業)을 봉승(奉承)하였다. 재건국민운동(再建國民運動 ) 경상북도(慶尙北道) 부위원장(副委員長)에 임명되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으 며 고령여자중고등학교(高靈女子中高等學校)의 설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 다. 고령군체육회장(體育會長) 재임 중에 많은 사재(私財)를 투입하여 체육회(體育 會) 육성(育成)에 큰 공적을 남겼다. 지역주민의 숙원이었던 덕곡면 노동(老洞 ) 대류지(大溜池) 설치를 추진(推進)• 완공(完工)시켜 덕곡면과 성주군 수륜면 일부 지역의 항구적인 한해대책(旱害對策)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량곡내 (一良谷內) 경로당(敬老堂)의 설립과 경로연(敬老宴)에 많은 사재(私財)를 출연(出 捐)하여 경로효친(敬老孝親) 정신을 실천하였다. 고령새마을금고의 전신(前身 ) 인 가야새마을금고 초대 이사장 및 2대 이사장을 역임(歷任)하면서 새마을금고 의 기반을 확충하였다. 고령군농협조합장을 퇴임하고 대가야읍 내곡2리 선양 동의 우죽통산(牛粥桶山) 아래에 삼고당(三顧堂)을 짓고 은거생할을 하던 중 향내사림(鄕內士林) 요청으로 성균관유도회(成均館儒道會) 고령군지부장(高靈郡支 部長)에 취임한 후 향풍교화(鄕風敎化)에 진력(盡力)하다가 1986년 4월 22일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