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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2 - 다. 1921년에는 고령상무사(高靈商務社) 좌사계(左社契) 반수(班首)를 지냈 고 1922년 5월에는 이봉조(李鳳朝)와 함께 관음사(觀音寺)를 신축하였다. 남채 우는 해방 직후 우익 단체였던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서 활약하던 동생 수 석(瘦石) 남형우(南亨祐)에게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는 등 물심양 면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해 1940년 가족이 모 두 망명하면서 태인당한의원(泰人堂漢醫院)도 문을 닫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46년 12월 25일 향년 7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대가야읍 내상리 동촌(東村 ) 선영하에 있다. 배위는 영길(永吉)의 딸인 여양진씨(驪陽陳氏) 추관(秋寬)이다. 참고문헌 : 최고.최초를 찾아라 고령기네스 (고령군/고령문화원. 2016.5월), 의령남씨족보(병술보) ●남형우(南亨祐) 본관이 의령(宜寧)이며 자는 성칠(聖七)이고 호는 유석(瘐石)이다. 고종 12년 (1875년) 아버지 상실(南相實)과 어머니 오해사(吳海沙) 사이에 3형제 중 차 남으로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서 태어났다. 7세에 한문사숙(漢文私塾)인 내 산서당(乃山書堂)에 입학하여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선생 문하에서 20세 까지 한문을 전공하였다. 28세에 상경하여 친척인 남상태(南相台) 댁에 머무르 면서 국내외 정세를 살피다가 1909년 서상일(徐相日), 안희제(安熙濟), 김동삼 (金東三) 등 청년 중심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 하여 활동하였으며, 상경하여 34세에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동교 법률학(法律學) 교수(敎授)로 재직하였다. 191 5 년에는 대구의 안일암(安逸庵)에서 윤상태(尹相泰), 서상일(徐相日)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中央總部)라는 결사를 조직하 여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활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 창원(昌原)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해삼 위 신한촌(海蔘威 新韓村)에서는 한족회(韓族會)를 근간으로 대한국민의회(大韓 國民議會)를 설립하고 손병희(孫秉熙)를 대통령으로 하는 등 각료를 선출 하였는 데, 그는 산업총장(産業總長)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동년 4월에는 국권회복단에 서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그는 고령인 최초로 임시정부 각료인 법무차장(法務處長)에 임 명되었다. 또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議員)에 선출되어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동년 5월에 법무총장(法務總長)을 시작으로 교통총장(交通總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