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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9 -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바 있었다. 1916년 9월 3 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이시영·정순영·홍주일·정운일, 그리고 대구의 최병규·최 준명·김진만·김진우 등과 서우순(徐祐淳)의 금고를 털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이 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었다. 그 후 1917년 11월 10일 장승원 암살 사건과 191 8 년 1월 24일 박용하 암살 사건으로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남에 따라 천안경 찰서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4개월 만에 풀려났다. 1950년 3월 2 9 일 향년 67세로 졸(卒)하였으며 묘는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 1990년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이 추서(追敍)되었으며 1992년 11월 고령의 진산 주산밑에 ‘애국지사(愛國志士) 백농(栢儂) 김재열(金在烈) 선생 현 창비(顯彰碑)’를 세워 나라 사랑을 위한 고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1986년), 고령문화사대계 1-역사편 (2008년) ●김정두(金正斗)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교찬(敎瓉)의 다섯째 아들로 1918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상동(上洞)에서 태어났다. 서울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중학교 전신) 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하여 일본명치대학법과(日本明治大學法科)를 졸업한 후 에 대구지방법원판사(大邱地方法院判事), 대구고등법원판사(大邱高等法院判事), 대구지방법원부장판사(大邱地方法院部長判事), 서울고등법원부장판사(서울高等 法院部長判事)를 역임하고 변호사(辯護士)를 개업하였다. 제3공화국 때인 1971 년 5월 25일 대구 동구에서 신민당(新民黨) 공천을 받아 제8대 국회의원(國會 議員)에 당선되었으며 1980년 12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시해(弑害)한 전 직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김재규(金載圭) 변호인(辯護人)을 맡았으며 1982년 민권당(民權黨) 사무총장(事務總長)을 거쳐 총재권한대행(總裁權限代 行)을 지냈다. 1985년 4월 5일 향년 68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대구광역시 달 성군 가창면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 헌정회 회원 프로필, 고령대관(1959년) ●김종구(金鍾球)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쌍림면장을 역임한 석배(錫培)와 청주양씨(淸州楊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