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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6 - 고령읍· 사부· 객기· 삼대교회와 달성군의 현풍·원교, 구지교회 등에서 당회장 (堂會長)과 시찰장(視察長)으로 사목(使牧)하였다. 의열단(義烈團)에 극비로 거 액의 군자금(軍資金)을 전달하고 항일독립투사(抗日獨立鬪士)의 가족을 지원하 는 등 독립운동에도 헌신하였다. 광복 후에는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상계몽 강연(思想啓蒙講演)과 애국가를 가르쳤으며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영도(領導 ) 하는 국민회(國民會)의 고령지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5월10일 실 시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落選)하였다. 특히 6•25 동란 때 대 구로 피난하는 고령군민 수천 명이 낙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는데 미육군(美陸 軍)이 작전상 이 철교를 폭파할 즈음에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위험지역 으로 들어가 유창한 영어로 미국책임자를 설득하여 폭파를 연기시켜 수많은 고귀한 인명(人命)을 구하였다. 공이 목사로서 박애정신(博愛精神)을 실천한 것 은 고령군민 전체의 흉금(胸襟)을 감동시켰다. 만년에는 삼대교회 목사로 봉직 하면서 학교법인 대구신명여학교의 이사(理事)를 7년간 맡았으며 1972년에는 경북노회장(慶北老會長)에 피선(被選)되었다. 1973년 4월 18일 하나님의 부르 심을 받아 향년 68세로 소천(召天)하였다. 노회장(老會長)으로 장례를 치렀으 며 묘는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 이독산 병좌(丙坐)에 있다. 배위는 김녕김씨(金 寧金氏) 차윤(且潤)이다. 참고문헌 : 도천 김상근 목사 기념비, 김해김씨 판서공파 파보, 고령세거성씨 편람 ●김상덕(金尙德)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현여(玄汝)이고 호는 영주(令洲)이다. 아버지 성옥(聲玉 ) 과 어머니 김경익(金敬益) 사이에서 고종 28년(1891년) 12월 10일 6형제 중 5남 으로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 55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2년 고령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서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경영학부(經營學部)에 들어갔다. 1919년 2월 8일 조 선독립청년단 대표로 동경의 기독교회관에서 도코 2·8독립선언 실행위원으로 선언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1920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 된 동방혁명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으며, 1923년 2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 의(國民代表會議)에서 개조파(改造派)로서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 의가 실패하자 북만주 한국독립당에 참여, 무장투쟁을 지도하였다. 1933년 신숙